우리는 자유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동의 자유를 빼앗긴 후, 늘 앉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선풍기를 독차지하고 건조함과 기분 좋은 더위를 즐기기로 한다. 오늘 약속되어 있던 일들은 전화로 카톡으로 취소하고 자유를 빼앗긴 오후지만 생산성은 좀 있기를 소망한다. (자유를 빼앗기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자유의 제한은 박탈이 아니라 절제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내가 박탈당한 자유를 알아보기 위해서 언어를 좀 더 신중하게 고를 필요가 있겠다.)
갈라디아서를 다시 읽으며 내가 꽂힌 주제는 다시 “자유”. 바울이 핏대를 세우고 침을 튀키며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 할례를 받으면 안된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바울은 두어번 할례와 무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율법 아래, 세상의 스토이케이아 아래, 초등학문 아래, 몽학 선생 아래, 보호자와 관리인 아래에 있는 종에게서 태어난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자유로 부르심을 받았다 (갈 5.13) 그 자유는 무엇일까?
“간디의 이 오두막은 보통 사람의 존엄을 끌어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세상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소박함, 봉사, 진실이라는 원리를 실행하여 얻는 행복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24쪽)
이반 일리치와 바울을 오가다 보니 바울 또한 사람의 존엄, 사람의 품위, 사람의 생명력을 짓밟고 질식시키는 사회 질서를 해체하고 원래 하나님이 뜻하셨던 대로 그것을 구현하고 증진시키는 복음의 진리, 자유로의 부르심, 그리스도의 기준을 말했던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자유로운가?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정된 선택과 소비의 자유를 자유라 믿으며 살고 있을 뿐. 그래서 우리는 점점 무력해진다. 우리는 고작해야 물건 사는 것을 잘할 뿐인 것 같다(나는 물건사는 것도 잘 못하지만...그래서 쇼핑도 쇼핑의 고수에게 지도 편달을 받아야 한다).
인간을 가난하게 만드는 부...한 사회의 가장 힘없는 사람에게서 자유와 해방을 빼앗는 파괴적인 부...사회적으로 또 인간의 본질에 치명적일 수 있는 풍요의 한계...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15쪽)
그가 말하고 있는 것과 내 경험이 일치한다는 것을 아주 또렷하게 인식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현대 산업 사회의 풍요 안에 살지만 빈곤하며 극심한 결핍을 호소한다.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은 점점 줄어들고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소위 전문가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우리의 필요를 말해준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옳은 일과 우리가 먹어야 할 옳은 음식과 우리가 사야 할 옳은 상품을 조언받는다. 극단적 안전을 추구한 대가로 우리는 모험하고 실패하고 성취하고 성장하는 기회를 박탈당한다. (전문가의 세상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실상 거의 없다. 오늘도 나는 내가 아프지 않다고 확신하지만 전문가가 그렇다고 판정내려주기 전까지 나는 잠재적 환자가 된다.)
우리의 가치는 이제 소비의 가치로 전락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무엇을 생산할 수 있는가로 평가받기 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소비할 수 있는가로 평가받는다. 매일같이 집앞으로 도착하는 택배 상자와 한 철을 못 넘기고 버려지는 물건들과 내가 먹는 음식과 소비하는 물건의 브랜드 말고는 나를 말해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세상은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천국이자 인간성 소멸의 현장...
모든 영역에서 전문가가 등장하며 우리는 서비스의 소비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와 함께 자발적으로 했던 일들, 당연하게 일상적으로 행했던 일들에서 우리는 지금 놀라울 정도로 심각하게 무능해졌다. 성장만이 살 길인 자본주의 사회는 불가능해 보였던 무한 성장이라는 과제를 수행 중이다.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의 무한 성장은 당연히도 파괴를 수반한다. 이제 성장의 기회비용은 성장을 앞지르고 있다. 합리적 이성이라면 성장을 멈추어야 하는데, 자본은 그럴 생각이 없다. 우리는 그것이 멈출 수 있는 것인지조차 질문하지 않는다. 이렇게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 생각한다. 이런 것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 질문하지 않지만 인간을 일개 부품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들, 관계를 부수고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것들...이것이 바로 몽학선생, 보호자, 관리자를 자처하는 스토이케이아가 아닐까...
“간디가 살았던 이 오두막보다 더 큰 곳을 원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과 생활방식이 초라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저는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살아 있는 자아를 죽어 있는 구조물에게 내어준 것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신체의 회복력과 삶의 생기를 잃었습니다. 이들은 자연과 거의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고 동료 인간에 대한 친밀감도 거의 없습니다.” (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21쪽)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 공포는 점점 실체가 되어 다가온다. 뭔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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