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하나님의 왕국에서 억압된 목소리들을 복원하기

BundleE 2020. 10. 22. 18:30

"It has proved the task and responsibility of marginalized readers today, both female and male, to restore the voices of the oppressed in the kingdom of God. In order to do this, they have had to be able as much as possible to read and hear the text for themselves, with their own eyes and with their own ears. And in the final analysis, they have had to be prepared to resist those elements of the tradition that have sought, even in the name of revelation, to diminish their humanity. In so doing, African American women have continued to read the Bible in most instances because of its vision and promise of a world where the humanity of everyone will be fully valued. They have accomplished this reading in spite of the voices from within and without that have tried to equivocate on that vision and promise."

 

Renita J. Weems, "Reading Her Way Through the Struggle"

 

"오늘날 소외된(주변화된) 독자들, 여성과 남성 모두,의 과제와 책임은 하나님의 왕국에서 억압된 목소리들을 복원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기 위해 그들은 텍스트를 가능한 한 스스로 읽고 들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마지막 분석에서 그들은 계시의 이름으로라도 그들의 인간성을 깍아내리려는 전통의 요소들과 저항할 준비가 되어야만 한다. 모든이의 인간성이 충만하게 가치있게 여겨지는 세계에 대한 비전과 약속 때문에 아프리칸 아메리칸 여성들은 대부분의 순간에 계속해서 성서를 읽어왔다. 그들은 그 비전과 약속을 모호하게 만들려는 내부와 외부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읽기를 성취해왔던 것이다."

 

우머니스트 성서해석에 대해 알아보다가 읽은 레니타 윔스의 아티클 마지막 문단이다.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타고난 어떤 것으로 인해 차별과 억압과 배제가 존재하는 세상을 살아오고 있는 미국 흑인 여성들의 성경읽기에 대한 글이다. 억압받는 자들의 성서 읽기는 승자들의 관점을 반영하는 성서 본문 자체와 문화를 지배하는 자(역시 승자)들의 읽기 전략 훈련으로 인해 겹겹이 왜곡과 좌절의 위험에 둘러싸인다.

 

어떤 본문을 '나의 관점'에서 읽고 '나의 해석'을 발화했을 때,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 이다.. 대부분 그 목소리는 외부에서 들리고 내부에서 공명한다. 그것에 대한 저항은 이중 삼중의 벽에 갇히고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그건 "나의 의견"이었을 뿐이라고 물론 틀릴 수도 있다고 변명한다. 권위있는 목소리들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면 안되는지를 내게 각인시키려 애쓴다. 내가 위험해 보이나보다.

 

레니타 윔즈는 아프리칸 아메리카 여성들이 성서를 읽을 때 이러한 전통/정통성을 빙자한 공격에 대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성경 해석에서 의지할 가장 믿을만한 가이드는 바로 억압받은 자신들의 경험이다.

 

어떤 읽기를 해야 하는가? 어떤 읽기가 옳은 것인가? 어떤 읽기가 억압받고 소외된 나를 일으켜 세우고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나를 반성시키며, 억압과 착취로 자신을 지탱하는 사회를 폭로하고 목소리를 빼앗긴 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사용되다가 버려지는 하나님의 딸과 아들을 존엄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고통받는 현실의 존재들을 지운 채 어떠한 객관적 기준을 만족시키는 "옳은" 독해가 있다는 주장은 언제쯤 자신의 실체를 드러낼까? 주장되는 것과 같은 "객관적 기준"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옳고 그름은 지배계급의 옳고 그름이며 그것이 모든 이의 옳고 그름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대가 주장하는 "옳은" 독해는 철저히 주관적인 판단에 불과하다는 것.

 

덧. 다음 주에 양혜원박사가 대중 강연을 한다는 소식을 사람들이 내게 알려주면서 괜찮냐고 물었다. 뭐. 별 생각 없었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그가 무슨 말 하는지 들어볼 필요도 있을지 모르니까.

레니타 윔즈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양 박사님의 생각은 바뀌지 않을거다. 그녀는 복음주의와 페미니즘 성서해석 사이의 삐걱거림과 그 불편한 긴장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에 대한 복음주의 어르신들의 불만과 불안을 영민하게 포착했다(기독교 페미니즘에 대한 비공개 토론에서 잘 알려진 초대형교회 목사께서 페미니즘은 불편하니 이름을 바꾸면 안되냐는 말을 듣고 받았던 충격이 생생하다. 그들은 페미니즘이 그 불편함을 야기시키기 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 모르는 자들이다. 한가하게 명칭 변경 운운하다니) 아마도 그에겐 갈등과 투쟁이 뻔히 보이는 기독교 여성들과의 연대보다는 복음주의 어르신들의 인정이라는 안락함이 더 매력적이었나보다. 이제 그는 한편으로는 페미니즘의 내부 고발자로 복음주의의 우수성을 외치고 다른 한 편으로는 페미니즘에 대한 횡설수설을 통해 기독교 여성들이 한 땀 한 땀 격렬한 저항과 투쟁으로 드러내 놓은 남성중심/남성우월-여성무시/여성차별/여성착취 기독교와의 전선을 모호하게 만든다. 복음주의가 양혜원에게 투자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누군가에게 마이크를 준다는 것은 그의 주장이 그 단체의 입맛에 맞는다는 말이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하는 자에게 누가 돈까지 줘가며 발언기회를 준단 말인가...

내가 너무 순진했다. 언제나 하는 다짐이지만..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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