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화되어버린 성서본문의 심폐소생
성서 텍스트는 수용, 해석, 사용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텍스트는 어떤 교의적 전제, 문화적 이데올로기, 혹은 교회의 실천과 관련해서 이해되어 왔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자신의 교리적 문제와 영적 관심을 가지고 텍스트에 접근한다. 어떤 성서 텍스트는 계속해서 인용되어서 그 의미를 상실하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텍스트와 '거리를 두게 됨으로써' 역사비판적 해석은 우리들 자신의 경험, 기대, 관심과 '이질적'이 된다(낯설게 된다). 기독교 신앙과 공동체가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역사적 인물과 그의 첫 제자들의 증언에 속박되어 있는 한, 이것은 역사비판적 연구의 중요한 '신학적' 기능이다. 따라서 성서의 역사비판적 해석은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에 의한 텍스트의 수용과정에서 신학적 교정물로 기능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올렌자, 『돌이 아니라 빵을』, 김윤옥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서울, 1994, 240-241)
'낯설게 하기defamiliarisation'의 반대편에는 '자동화 automatisation'라는 개념이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가 강조한 개념이다.
자동화란 관습적 인식이다. '낯설게 하기'는 대상을 낯설게 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고 이를 통해 정신의 관습적 태도에 충격을 주어 새로운 경험의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금요일 오전 원전강독에서 요한일서에서 발견되는 죄에 대한 강조와 이 본문을 전제로 하는 죄에 대한 교리적 강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판에 박힌듯한 "죄 자복, 죄 고백"은 이제 차라리 지루하다. 이런 고루함과 지루함이 요한일서의 주옥같은 글을 지겹게 만들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교리적, 즉 관습적으로 읽혀지는 성서본문을 "낯설게 하기" 관습적 사고에 충격 주기, 성서의 새로운 의미와 낯선 하나님을 마주하기...피오렌자는 성서학, 특히 역사비평적 해석이 이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비평적 해석에 대한 비판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이것이 중요한 이유다. 화석화되어버린 성서본문의 심폐소생이랄까?
여기 우리들의 신학 팟캐스트
네이버 오디오클립 : audioclip.naver.com/channels/2453
팟티 : podty.me/cast/194201
iTunes : bit.ly/theoyws
'구독'과 '좋아요'와 '댓글'은 언제나 환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