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어떤 꿈을 꾸며 살아내는가
여당 대표 이낙연이 "주식시장이 국민 재산증식 무대 되게 할 것”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여당 대표라는 분이 국민들에게 줄 수 있는 ‘비전’이라는 것이 고작 “주식투자를 통한 재산증식”이라는 말인가? 그런데 이런 일차원적인 비전…좋다…그런데 이거 믿을만한건가? 실물경제가 이토록 형편없는데 주가가 상승하는 것은 나같은 문외한에게도 매우 의심스럽고 위험하게 보인다. 왜 주가는 상승하는가?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 금리는 낮아지고 시중에 풀린 어마어마한 돈, 그 돈이 간 곳이 주식시장이라 그런 거 아닌가? 중학교 때 배운 간단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적용하면 사람들이 계속 사니 가격이 오르고, 언론이 떠들고 정부가 부추기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주식으로 몰리고 그러면 더 가격이 오르고 그런거 아닌가? 그러나 실물경제가 뒷받침되지 않는 주가 상승이라는 것이 과연 지속가능한가? 아니 사실 말이 되는가? 주식이라는 것은 일종의 상징인데 그 상징이 가리키는 실체와 상관없이 자기 증식을 하고 있는 이 상황이 기괴스러운데. (수없이 경제 위기를 겪고도 소위 자본주의 경제 전문가들은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말을 아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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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 "주식시장이 국민 재산증식 무대 되게 할 것"
[머니투데이 정현수 , 권혜민 기자] [[the300]]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8일 "동학개미가 우리 경제를 떠받치는 새 힘으로 더욱 커지길 바란다"며 "주식시장이 국민 재산증식의 무대가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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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논문을 읽었다. 사회학자 김홍중이 쓴 “꿈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 부르디외와 벤야민을 중심으로” 인데, 그는 부르디외의 “상징자본”의 개념을 빌어 “꿈-자본”이라는 용어를 조어한다. 꿈-자본이라는 용어/개념을 통해 그는 꿈을 둘러싼 낭만화된 인식가능성을 불식시키고 꿈마저 경쟁적으로 획득, 추구, 재생산되어야 하는 엄중한 사회적 내기물(50)이라는 현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본다. 또한 꿈의 수행성에 잠재되어 있는 저항과 변화의 가능성에도 주목한다. 그의 글을 읽다가 이낙연 대표의 기사를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 있었다.
“권력은 행위자들의 능력에 개입해 그것을 육성, 통제, 전유하고자 한다. 권력은 꿈을 꾸게 한다. 꿈을 통해서 특정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욕망과 희망을 증여한다. 이를 통해서 행위자의 ‘행동을 통솔’하고자 한다.(44)”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고 이한빛씨의 아버지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들을 절망하게 한 ‘중대재해처벌법’을 두고 노회찬이 기뻐할거라고 말했다는 조국 전장관이나, 기업을 압박하기보다는 꼼수의 여지를 열어준 이번 법제정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라 부르며 치켜세우는 우상호 의원 등을 보며 대체 이 사람들이 지금 뭣을 하고 있는가하고 생각했는데, 김홍중 교수의 글을 읽고 이것을 꿈의 투쟁이라 부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 김용균씨와 고 이한빛씨와 올해도 노동 현장에서 속절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생명들과 그 가족들과 동료들의 꿈이 그들이 뽑아준 정치인들에 의해 짓밟혔다. 그리고 그 남은 목소리마저 질식시키기 위해 새로운 꿈이 제시된다. “주식을 통한 재산증식”의 비전. 그 달콤한 꿈. “내가 너로 부자되게 하리니!” 이제 “아멘, 믿습니다”를 외치며 그를 따르는 광적인 무리들이 줄을 잇는건가? 그는 “한국판 뉴딜과 미래산업육성, 금융혁신, 규제혁파 등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담긴 단어 하나 하나가 민중과 노동자의 숨통을 죄어오는 단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이 모든 것이 “중대재해처벌법”이 참된 의미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될 수 없었던 이유가 된다.
마르셀 모스는 마술에 대한 고전적 연구에서 “마술사가 발휘하는 힘은 마술사 자신에게서 오는 것도 아니고 그가 사용하는 도구나 조작, 혹은 재현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마술의 매혹과 현혹적 힘의 원천은 마술을 대하는 집단이 마술에 부여하는 집합적 믿음으로부터 온다. 사회가 마술에 대한 믿음을 창조한 작인”(Mauss, 1995: 84-90, 김홍중 2015: 46)이라고 했다 한다. 마술이 먹히는 것은 마술에 부여하는 집합적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거부와 저항의 대상이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꿈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는 꿈이 언제나 교섭의 대상이라는 점, 권력의 꿈 뿐 아니라 저항의 꿈도 자라날 수 있다는 것, 욕망의 방향과 대상을 완벽히 통치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권력과 저항이 의도대로 통솔되지 못하는 양자의 구별불가능성의 영역이 바로 꿈이다.(김홍중, 44)”
푸코가 말한 대항-담론처럼 대항-꿈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담론처럼 꿈도 헤게몬에 의해 크게 좌우되지만 또 완전히 통제될 수는 없다. 이쯤에서 “교회는 어떤 꿈을 꾸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대항-담론, 대항-꿈의 강력한 발원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게게 꿈다운 꿈을 꿀 권리를 되찾아 주고, 지배자-꿈에 억눌린 민중들에게 꿈의 자유를 꿈의 권리를 돌려줄 수 있는, 그 꿈을 위해 싸울 수 있는 동력을 공급하는 공식적인 사회적 제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은 현실을 은폐하고 굴절시킬 위험도 가지고 있다. 교회에서 우리는 아주 오랜동안 “꿈”만 꾸어왔다. 교회는 현실의 고통을 망각하기 위한 꿈을 제공하고 그래서 신자들을 현실에 적응하게 한다는 맑스의 비판처럼 말이다. 그러나 김홍중의 꿈은 꾸는 것 뿐 아니라 “수행”하는 것이다. “꿈만 꾸라”는 선포는 예수의 그것과 성서의 모든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예수는 꿈을 꾸었고,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예수의 주위로 모여들었고, 그들은 자기들의 꿈을 살았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을, 회중을, 동네를, 지역을, 세계를 변화시켰다. 나는 지금도 수많은 좌절과 절망과 방해가 있지만 예수의 꿈을 꾸고 예수의 꿈을 사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김홍중은 베버가 『프로테스탄트즘과 자본주의 정신』에서 캘빈주의가 제시한 꿈이 어떻게 신자들의 삶을 추동했는지 잘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베버의 행위이론은 자본주의가 단순한 경제시스템이 아니라 거기 연루된 행위자들의 심적 에너지를 조직하는(낙원을 꿈꾸게 하는) 마음의 시스템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시스템으로부터 창발하는 독특한 실천양식들의 기원에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향한 욕망이 아니라 종교적 구원을 향한 강렬한 ‘꿈’이 있었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꿈을 거세하는 차가운 합리성의 시스템으로 간주되는 자본주의는 사실 간절하고 절박한 몽상 에너지의 응집을 통해 작동하고 있었다.(39)”
이와 같은 힘이 교회에 있었다면, 이제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수많은 문제들에 저항하여 대안적 질서를 구성하고자 하는 “몽상 에너지의 응집”과 수행이 불가능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도 꿈을 꾸고 꿈을 살자.
김홍중, “꿈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 부르디외와 벤야민을 중심으로”, 『경제와사회』, 2015.12, 3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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