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ndleE 2021. 1. 13. 13:23

"열다섯살이 되었을 때, Elie Wiesel은 아우슈비츠에 있었다. 탈무드의 선생 한명과 친해졌는데 그는 그들이 함께 있을 때마다 탈무드를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펜과 연필 없는, 종이도 없는, 책도 없는 탈무드. 그가 말한 탈무드는 바로 그들의 종교적 저항 행위였다. 어느 밤, 그 선생이 Wiesel을 자신의 막사 뒤로 데려 갔다. 거기에서 어린 소년 한 명만이 유일한 증인으로 참석한 채 세 명의 위대한 유대인 학자들 - 탈무드, 할라카, 유대 법학의 대가들 - 이 신을 기소했다. 그들은 괴상한 장소에 만군의 주를 기소할 랍비식 법정을 만들었다. 재판은 몇 날 밤에 걸쳐 진행되었다. 증언이 경청되었고 증거가 취합되었으며 결론이 도출되었다. 마침내 이 모든 것을 근거로 그들은 만장일치의 판결을 내렸다: "만군의 주 하나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는 피조 세계와 인간에 대한 범죄에 있어 유죄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나서, Wiesel이 ‘무한의 침묵’이라 부른 시간이 흐른 뒤, 그 탈무드 학자는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저녁 기도를 할 시간이군요’라고 말했고 그 법정의 조사 위원들은 Maariv, 저녁 기도를 암송했다." (Elie Wiesel (1979), The Trial of God (New York: Schocken), Bellinger, “The Pasalter as Theodicy Writ Large, 157에서 재인용)

 

구약교수님이 일종의 방학 숙제로 내주신 시편에 관한 글을 읽다가 예상 밖의 감정을 느꼈다. 난 이제 신앙서적을 읽지 않는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감동을 주려고 의도된 글들을 읽으며 감동을 느끼고 싶어하던 시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이렇게 신학 자료들을 읽다가 감동을 받을 때면 마음 속 깊숙이에서 하나님과 어떤 감정을 동원하는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싶은 욕망을 발견한다. 다만 이전의 방식으로가 아니라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신앙 용어들이 아니라 뭔가 다른 방식, 뭔가 다른 언어, 뭔가 다른 접근이 필요할 뿐인걸까? 아우슈비츠의 막사 뒤 어둠이 깔린 장소에 모인 삼인의 유대인 학자들과 한 명의 유대인 소년. 하나님은 유죄! 라는 판결뒤에 그들 사이에 무겁게 흐른 침묵. 그리고 이어진 저녁 기도. 이 장면에 가슴을 후비고 들어오는 무언가가 있다.

 

*Elie Wiesel은 극작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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