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두크나이트와 복음주의

BundleE 2021. 1. 15. 00:10

두크나이트의 뉴스앤조이 기사를 읽고 나도 횡설 수설

 

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1720

 

"정치, 종교, 법, 경제 등이 고르게 분화해 고유 영역을 갖는 서구 근대와는 달리 한국 근대 사회는 모든 영역이 정치, 경제의 분야의 식민지가 되었다." (<2030이 한국교회에게> 중년 남성들의 '민주당, 아저씨 복음주의> 중, 2020. 11.10. 뉴스앤조이)

 

'서구는 어떤데 한국은 이 모양이다'라는 식의 설명은 고리타분하다. 트럼프의 미국을 보자. 모든 것이 민망할 정도로 대놓고 정치와 경제로 환원된다(바이든의 미국도 대동소이할 것이다). 또 보수 정치와 공모한 보수 기독교는 미국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저자는 진보적 복음주의가 민주당에 종속된 종교집단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이런 분석을 끌어들이는 것 같은데, 동의하기 어렵다. 이것은 한국의 국지적 현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화된 지구적 현상이다.

 

정치 경제에 종속된 식민화한 종교가 아니라 종교 고유 영역을 가진 종교란 대체 무엇인지도 모호하다. 저자는 반-박근혜, 반-새누리당의 깃발 아래 연대했던 복음주의 세력의 행위는 옹호하는 듯 보이고 조국과 박원순 사건등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를 했어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니까 앞의 행위는 종교 고유 영역이고 뒤의 행위는 정치에 종속된 식민화된 종교의 것이라는 건가? 저자가 '종교 고유 영역'을 정의하지 않은 채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에 이런 행위가 각각 '종교 고유 영역'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반-문재인, 반-민주당이면 진보적 복음주의는 정치에 종속되지 않은 '고유한 종교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 되는 것인가? 그러나 '고유한 종교 영역'이라는 것이 실제 존재하는가?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는 면이 있지만, 진보적 복음주의를 '민주당 복음주의' '아저씨 복음주의'라고 부르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 (진보적) 복음주의 안에는 수없이 많은 결들이 존재하고 다양한 의견이 있다. 복음주의 운동과 교회에는 유일한 성, 유일한 세대인 아저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줌마도 있고 노년층도 있고, 청년들도 있고 청소년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여성, 남성, 성소수자 모두가 있다. (청년과 아저씨의 이분법을 통해 전자에는 긍정적 함의를 후자에는 부정적 함의를 부여하는 것은 age 차별적 언술이다.) 저자는 여성문제, 성소수자 문제를 복음주의가 제대로 다루고 있지 못하다고 제대로 지적하면서도 그가 진보적 복음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은 지극히 남성 엘리트 지도자적이다. 그래서 진보적 복음주의는 아저씨들만의 복음주의로 환원된다. 그래서 진보적 복음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살아있는 존재들이 지워지는 결과를 낳는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진보적 복음주의가 젠더 이슈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은 민주당 때문이 아니라 복음주의의 보수적 신학의 문제다. 신학의 문제이기에 신중하고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복잡하고 예민한 신학적 문제를 풀기 위해 많은 시간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복음주의 안에서 위험하게 들릴 수도 있는 전향적 의견을 내놓는 학자들과 목사들이 있다. '아저씨 복음주의'안에서는 그들의 존재 역시 지워진다. (진보적 복음주의 진영의 많은 남성 지도자들의 젠더감수성이 전반적으로 형편없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들은 대체 젠더 문제에 대해 왜 신경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진보적 복음주의를 감싸줄 생각은 없지만, 진보적 복음주의가 민주당에 종속된 종교집단이라는 그래서 민주당의 정책에 맞추어 진보적 복음주의가 자신의 신학과 의견을 정향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다. 물론 '민주당 빠'인 여러 사람을 알고 있지만, 한 교회안에 동일한 정치적 성향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진보적 복음주의 진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이들이 말을 많이 하고 있을 뿐 모두 다 그렇게 여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 연재 기사에서는 복음주의의 지성에 대한 사랑을 비판하는데 이 글에서는 조용기 식의 3박자 구원에 대한 향수마저 느껴졌다. 진보적 복음주의는 배우지 못한 사람도 공감하고 그 안에서 신앙을 정립할 수 있는 직관적이고 단순한 신앙적, 신학적 구호를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해 그리고 다분히 학문적인 용어를 사용해 담론을 전개한 것에 대해 비판받는다.

 

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2048&fbclid=IwAR1Y3peVZ74jJnd9LShzHHT1HVQ1JI0VHj0fDFmqc59XWCpjp0kKq7Jb1bo

 

우선, 중산층 중심의 신앙은 진보적 복음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의 문제다. 누가 교회에 가는가? 교회에서 어떤 계급이 중심을 형성하는가? 저자가 추켜세우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는 그래서 배우지 못한 하층 계급을 위한 교회인가? 천막에서 시장 상인들, 가난한 동네 사람들과 함께 성장한 순복음 교회가 여의도에 초대형 성전을 지으며 3박자 구원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했을 때 이미 그 곳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진보적 복음주의가 조용기식의 3박자 구원과 같은 대량판매될 수 있는 신앙상품을 개발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들의 높은 지적 수준 때문이 아니라 지식인의 양심에 가까운 것이리라. 그들은 자신들이 배운 신학과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과 교회를 그런 식으로 기망할 수 없다 정도의 양심은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조용기식 3박자 구원을 통해 누가 어떤 수혜를 받았는가? 조용기의 신이 대한민국의 신이었다는 말은 심지어 모욕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조용기의 신을 나의 신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같은 맥락에서 진보적 복음주의의 하나님이 대한민국의 하나님이 될 필요도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생태학에서 생물학적 다양성이 중요한 것처럼 한국 기독교안에서 신학적 다양성이 좀 더 풍부해지고 존중되고 장려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진보적 복음주의를 비판적으로 읽고 그것에 발전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진보적 복음주의가 한국 현실의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어떤 신적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보적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계급적 기반 위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보고, 목격한 것에 대해서만큼은 외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들의 시대에서 일정한 사회적 역할과 종교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진보적 복음주의가 여전히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겠지만, 저자의 말처럼 다른 사회, 문화적 기반과 자본을 가진 존재들이나 그룹들이 분화할 수도 있고 그들 역시 자신들이 본 만큼에 대해서는 신 앞에서 정직하게 말하고 행한다면 기독교의 미래가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다고 본다. 진보적 복음주의의 대표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지 말자. 무엇보다도 '진보적 복음주의'를 '그들'로 환원하지는 말자. 그 안에는 아주 다양한 흐름들이 꿈틀대고 있으며, '진보적 복음주의'라는 저수지가 그 물결들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둑을 터뜨리고 나와 각자의 길을 트면서 지류를 형성할 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진보적 복음주의의 다양성을 가시적으로 확인하게 될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여전히 진보적 복음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진보적 복음주의가 일종의 '원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어보인다.

 

 

여기 우리들의 신학 팟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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