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트만과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
불트만은 20세기 초 독일 신학계가 역사적 예수 연구와 결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양식비평을 통해서는 역사적 예수 탐구의 불가능성을, 실존주의적 신학에 근거해서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부적절성을 선언했다. 불트만을 정점으로 하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붕괴’라 불리는 기간(1906-1953년)이 있었지만 역사적 예수 연구는 불트만의 회의주의를 딛고 다시 부활해 ‘새로운 탐구’를 거쳐 ‘제3의 탐구’, 혹은 ‘예수 연구’라 불리는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예수-그리스도에 자신의 존재 근거를 두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존재하는 한 역사적 예수 연구 는 회피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욕망이자 필요인 것 같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 발견은 완수 가능한 과제인가? 달리 말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불트만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한가?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 탐구(연구)라는 용어 자체가 부적절하며, ‘역사적 예수의 재구성’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크로산에 동의해 가울러 역시 “모든 세대는 어떤 시대 어떤 장소에서든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발견/발굴이 아니라)해야만 한다’ 우리의 가장 좋은 이론과 방법은 단지 우리의 (제한적이고 구식이고 운이 다한) 이론과 방법일 뿐이다. 하지 만 과거와 현재의 소리를 서로 관련시키는 이 대화적인 과정은 단지 가능할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3이라 고 말한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불)가능성 여부와는 별개로, 과거와 현재의 소리를 서로 관련시키는 대화적인 과 정’이 신학과 교회의 현 장에 있는 우리 모두의 과제이기에 우리에게는 역사적 예수 연구(혹은 재구성)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역사적 예수의 연구사를 발제했는데, 발제문의 도입을 가져왔다. 이제사 조금씩 학자들이 쓰는 용어를 이해하고 논쟁의 요점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생각해 보면 내가 전혀 뭔지 알지도 못한 채 처음 접했던 역사비평적 연구는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의 『But She Said』 였다. 영어 감각이 무뎌져 있을 때였는데 떠듬떠듬 한 줄 한 줄 거의 해독의 수준으로 읽었더랬다. 읽고나서도 이해되지 않는 용어들 투성이였다. Postivism에 대해 저자가 비판하는 것 같은데, 사전을 찾아보니 '실증주의'라고 나왔다(처음엔 긍정주인줄...ㅠ). 어...실증주의는 뭐지? apophthegm은 뭘 뜻하는 걸까? 양식비평은? 타이센의 방랑하는 카리스마적 인물은 또 뭘까?
이건 그러니까 요즘 회자되는 문해력의 문제다. 당연히 전제되는 용어들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텍스트의 의미에 가 닿을 수 없는. 두꺼운 고무장갑을 끼고 물체를 만지고 있어서 그게 정확히 어떤 촉감인지 알 수 없는 답답한 느낌 (설겆이를 맨손으로 하게 되는 이유)인거다. 그러면 책읽기가 재미가 없고 안 읽으면 독해력은 더 떨어지고... 그렇게 생각하면 약 3년만에 문해력의 비약적 발전이 있었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쉬슬러 피오렌자의 글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 한 책 모임 준비를 위해 But She Said의 한 챕터를 번역을 했는데, 수월하게 저자의 논지를 파악하고 이제 그녀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의견도 가지게 되는 것을 보면서 내심 놀라고 뿌듯했다. (기회를 만들어 오디오 클립으로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익혀야 할 것은 산더미 같고, 가야할 길은 까마득하며, 시간은 너무 빨리 흘러서 현기증이 난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인 건 맞는데...천리길에서 한걸음 두걸음이 언제쯤 모여서 티가 나려나...ㅠ(아님 벌써 티가 나고 있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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