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에 대한 해석 비판

BundleE 2021. 4. 14. 11:07

「마가복음 12:41-44에 나타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연구」, 이민규

 

이 논문은 마가복음의 자신의 전재산 두 렙돈을 성전에 바친 과부를 보고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신선한 해석을 제시한다. 전통적으로 이 본문의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놓은 참된 신자의 모습으로 추앙되었고 필자에 따르면 적어도 칼빈 이후로 이러한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라이트(A.G.Wright)는 전 재산을 바치는 과부의 봉헌이 과부의 재산을 탐하는 “서기관”에 대한 예로 보아야 한다고, 따라서 예수의 언술은 예루살렘 당국자들에게 종교적 헌신을 맹신하게 되어 기만당하는 것에 대한 탄식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라이트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이 주장의 타당성을 (1) 서기관과 성전 제사장의 관계 (2) 누가의 병행본문에서의 의미 (3)마가의 성전에 대한 이해와 같은 측면에서 검토하고 있다.

 

서사비평적 관점에서 해당 본문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서기관들에 대한 비판(12.40)과 13장 1-2의 성전 파괴 예고 사이에 놓여 있다는 것, 누가에 나타나는 평행본문의 위치도 이와 동일하다는 것은 과부의 성전에의 봉헌 역시 부정적으로 읽힐 수 있음을/혹은 읽어야 함을 보여준다. 1세기 유대사회의 과부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는 이들이 자력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렵고 때로는 생계를 위해 자신의 성마저도 팔아야 했던 최하위계층이었음을 보여준다. 율법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회적으로 보호하라고 명하고 있으나 1세기 유대사회에서 그들을 위한 적절한 사회적 시스템은 작동하고 있지 않았고 오히려 성전 시스템은 신앙과 경건을 미끼로 사회 가장 밑바닥 민중들의 마지막 한 푼까지 흡혈하듯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의 언술이 칭찬이 아니라 탄식이라는 해석은 지지될 수 있다.

 

상당히 신선한 필자의 주장은 그러나 요상한 방식으로 성전을 교회로 대체시킨다. 그는 과부가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한 것을 마가가 비판하고 있으며, 그 봉헌이 그리스도교의 교회에 드려졌다면 칭찬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본문에 나타나는 과부의 헌신이 새로운 성전인 그리스도와 교회공동체를 향한 것이었다면 당연히 축복받았을 일이며 칭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236)” 그러니까 ‘봉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봉헌하는가의 문제이며, 유대교 성전에 전적으로 맞서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던 마가의 공동체에게는 이것이 중요한 이슈였으리라 주장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만이 유일한 참 성전으로 믿는 기독교는 정체성을 확립해서 확연히 옛 언약의 성전과 동물 제사제도를 고집하는 유대교와 결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235) ”

 

나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런 자의식을 확고하게 가졌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들은 예수 사후에도 성전 예배와 율법 준수를 중요하게 여겼고(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 유대교와 자발적으로 반정립한 것이 아니라 축출되면서 서서히 독립된 정체성을 구축해나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과부의 봉헌의 의도에 대해 질문하고 봉헌의 대상이 문제였다는 주장 또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유대인은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돌보는 아름다운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실천되었는가는 다른 문제이지만 말이다. 기독교 역시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돌보라는 가르침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실천되고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이런 식의 읽기는 너무나 쉽게 반유대적으로 흐르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논문의 요지가 과부의 마지막 고혈까지 짜내는 종교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고발과 비판이 아니라 과부의 봉헌은 교회에 바쳐져야 한다는 주장을 발전해서 당황스러웠다. 거대한 교회들이 건축될 때, 노점상으로 폐지 수집으로 한 푼 두 푼 모은 권사님들이 자신의 전재산을 바친다는 괴담을 우리네 교회는 오랫동안 미담으로 회자해왔다. 예루살렘 성전이 이스라엘 기층민중의 고혈을 빨아들이며 화려하고 웅장하게 서 있었던 것과 오늘날의 거대한 교회가 유비이면 유비이지 대조나 대안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본문의 대안적 해석은 어디에 봉헌하는 것이 옳은가가 아니라 성전과 교회의 참된 기능의 회복에 대한 고민으로 귀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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