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초입에 누가를 생각하며
누가-행전에는 비혼 여성들이 많이 나온다. 신약성서에는 과부, 처녀, 이혼녀가 모두 등장하는데, 이들에 대해 누가-행전의 저자 누가와 바울은 비슷한 의견을 피력한다. 누가와 바울은 이들이 비혼으로 남는 것을 장려하고 지지한다.
유대주의, 헬레니즘, 로마문화 모두에서 '과부'가 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신명기 법전에서 과부를 돌봐야 한다는 신학적 권고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유대 사회가 이들을 '남자 없는 여자'로 사회에서 목소리를 잃고 사회적 안정망을 확보하지 못한 완전히 취약한 상태의 존재로 봤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의 현실이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어린 여성(12-14세)이 나이든 남자에게 시집가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젊은 과부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재혼할 것이 권고 되었다고 한다(아우구스투스 법률: 가임기 여성은 모두 다시 결혼할 것이 권고됨). 독립적 삶을 가능케 하는 자원을 가지지 못한 여성들에게는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와 바울은 여성들이 비혼의 상태로 남을 것을 장려하고, 특히 누가-행전에서는 비혼의 여성들이 유지하는 성적으로 금욕적 삶이 명예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교회 안에서의 활동과 영적인 은사도 비혼 여성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문제는 과부로 남느냐 재혼하느냐 여부가 진짜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있으려면 그들에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생계가 해결되지 않은 여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공동체는 아주 초기에서부터 유대교와 유사하게 과부들의 생계를 지원하는 제도를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과부들의 생계를 지원함으로써 그들이 비혼으로서 독립된 그리스도인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가능케 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다비다(도르가)와 같이 자신의 집에서 과부들을 돌보는 개인들도 있었지만, 이런 개인 구제도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바울이 비혼의 여성들(그리고 남성들)에게 주는 비혼 상태로 남으라는 권고는 공동체가 제공하는 사회적 안정망이 있어야만 실현 가능한 것이 된다.
디모데 전서와 누가, 바울을 비교하면 누가와 바울이 가진 독특한 관점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디모데전서의 저자는 가부장적 결혼을 지지한다. 그는 비혼 상태의 젊은 과부들을 진짜 과부로 인정하지 않는다. 과부로 인정이 되어야 공동체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이들은 이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재혼으로 몰리게 된다. 디모데전서의 저자는 노골적으로 로마 사회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젠더적 이상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밀어붙인다.
누가도 충분히 가부장적이고 바울도 읽다보면 열받는 구절들이 있다. 그렇다고 누가와 바울이 여성 적대적이기만 하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의 여성들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존중했다. 그렇다고 누가와 바울이 페미니스트인 것도 아니다. 젠더적 측면에 있어서도 성서의 저자들이 자신의 글을 통해 드러내는 복잡한 측면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간다. 한 여름 누가가 얼마나 반페미니스트적인가에 몰두하며 차곡차곡 화를 쌓아갔는데, 겨울의 초입에는 누가가 공동체의 여성들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고 있고 어떤 고민을 했는지에 대해 곰곰 생각한다. 누가가 어째서 남성 리더십과의 관계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한정짓는가에 대한 고민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누가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건지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나의 편향된 시선과 확증편향적 독서에 제동을 걸고 날카로운 비판을 가해주셔서, 경주마 시야로 마냥 한 방향으로 내달리는 나를 멈춰 세우고(멈춰 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랍다) 아주 둔하긴 하지만 사고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선생님을 만나 매우 고통스럽고 매우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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