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나도 역사책이 싫었다

BundleE 2021. 12. 9. 10:46

나는 인류에게 역사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개인에게 꿈이 중요하듯, 역사는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꿈을 꾸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는 미치고 말 것이다. 
꿈은 정신을 맑게 하며, 비밀을 가르쳐주고, 
우리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가르쳐준다.
이야기와 역사는 집단적 차원에서 꿈과 동일한 효과를 지닌다.
- 이사벨 아옌데

나는 역사가 싫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역사책'이 싫었다. 내가 읽고 있는 역사는 남자들이 시작하고 이끌어온 역사, 여자들은 들러리 역할도 제대로 허용받지 못하고 밀려나는 역사였기 때문이다. 아옌데의 말처럼 역사는 집단 차원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자리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기존 역사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패배감과 소외감 섞인 자기확인밖에 없다면 차라리 더는 역사책을 읽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로잘린드 마일스 지음, 신성림 옮김, 『세계 여성의 역사』, 파피에, 2020, 옮긴이의 글 중, 482

 


나도 역사책이 싫었다. 도무지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대학입학을 위한 본고사에서 수학과 국사 중 택해야 했을 때 아무 고민 없이 수학을 택할 정도였으니까. 어쩌면 역사책이 내가 누구인지, 나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으면서도 끈질기게 남성이 어떤 존재인지 얼마나 위대한지는 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반면 수학은 골이 빠개지더라도 실존적 소외와 갈등을 야기하지는 않아서 더 좋아했는지도. 

나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여성의 역사를 재건하는 데 아주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성서본문의 배후에 놓여있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설립과 성장에 기여한 적극적이고 유능한 여성들의 역사를 복원하고 싶다. 그들의 감춰지고 침묵당한 이야기를 페미니즘 성서해석의 발전과 성과에 기대어 듣고 읽을 때 신명난다. 그러나 2천년 전 자매들의 삶에 21세기의 나라는 독자의 생각과 욕망을 투사해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위축될 때가 종종 있다. 

내가 이 책 『세계 여성의 역사』를 펼쳐든 것은 이런 (내 읽기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다. 내게는 18세기 이전의 여성들의 역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비참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고 과거의 여성들이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식의 '납작'한 이미지로 표상되어서 이 의심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이 책을 읽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모든 시대, 모든 지리적 공간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려왔고, 활약했으며, 자신이 남자와 동등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부단히 싸워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다. 나는 모든 여성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모든 여성의 역사를 다루지는 못한다. (한국 여성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 여성의 역사를 발굴하고 저술하는 한국 (여성)역사학자의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목에서 나는 『세 여자』를 떠올렸다.) 그러나 18세기 이전의 여자들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저항하지 못한 채 오로지 순응과 순종만 했을 것이라는 것, 우리에게 가르쳐진 또 하나의 거짓말일 뿐이다. 

가부장적 사회는 여성과 남성을 이항대립적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여성과 남성은 서로 보완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인정된 가치를 가진 특징은 남성에게 그것의 반대 특징은 여성에게 부여함으로써 여성은 본질적으로 열등한 존재이며 남성 없이는 무가치하다고 주장해왔다. 우리는 이러한 거짓말의 좀 더 세련된 변주들을 여전히 보고 듣고 있으며 안타깝게도 그것을 '체화'한다. 과학이 모든 세계의 중심이 되었던 시대에 남성들은 이 거짓말을 잘도 과학적으로 증명 했다. 프로이드의 남근중심적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도 그 일환이다. 프로이드식의 이런 유사과학적 주장은 수많은 형태로 변주되어 우리의 정신과 몸으로 스며든다. 많은 여성들은(예외없이 나도) 자신의 몸을 열등한 것으로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여성이 자기 몸에 대해 느끼는 이런 감각과 감정은 여성이 자신의 몸을 남성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인 것 같다. 나의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몸의 주권이 내게 없다.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그리고 가부장적 사회의 자본주의적 매체 확성기를 통해 완곡하게 말해지는 메시지를 고려한다면 내 말이 그렇게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2021년에도 여전히 대한민국의 법이 가부장제의 눈으로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만큼 명백한 증거가 또 있을까? 남자들은 임신중단권이 전적으로 여성들의 의지에 맡겨지면 우리 사회에 태아 살해가 만연할 거라고 믿는 것 같다. 이게 21세기 한국 남성이(진보적이건 보수적이건) 여성들에 대해 가진 생각의 수준이다. 남성 인간의 시선에서 여자들은 미개하고 잔인하고 위험하다. 이런 여성혐오는 남성에 의한 여성 차별과 위협, 폭력과 살해를 정당화 한다. 자신의 몸에 대한 완전한 권리를 가지지 못하는 것과 여성이 사회에서 온전한 성인이자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은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다. 

"현대적이라고 위장하는 대중매체 산업들은 사실 생식기를 이용해서 우리를 미래에서 뒷걸음질 치게 만들고 있다. 바로 이곳이 우리의 새로운 전쟁터다. 여성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이 벌어질 새로운 활동무대인 것이다. 수천 년간 이어진 인류문명은 자연, 생물학, 종교, 심리학, 두뇌의 크기, 여성의 정신능력에 기반을 두고 여성의 열등함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여성들은 읽고, 돈을 소유하고, 투표권을 가질 권리를 위해 저항해왔고, 억압들이 하나씩 제거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아직 남아 있는 억압들 역시 '천부적'이고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확신되었다. 그런데 가장 밑바닥에 깔린 근원적인 억압의 양식도 조금씩 변화하였다. 지금까지의 투쟁으로 얻은 성과를 축소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단지 전 세계의 페미니스트들은 이제 더 근원적인 투쟁에 당면하고 있으며,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다...이런 상황은 끝이 없으며 그 자체로 여성들의 역사를 구성한다. 만들어내는 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막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은 단순히 생존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투쟁의 의미를 얻기 위해서도 항상 싸워왔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단순히 새로운 정의를 얻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정의할 권리'를 갖기 위해 조직적으로 단결하고, 집단을 형성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위의 책, 477-78)

**여성의 몸에 대한 주제를 다룬 정말 훌륭한 컨텐츠가 있다. 팟빵 "말하는 몸 - 내가 쓰는 '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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