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베버는 칼뱅주의가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BundleE 2022. 4. 10. 12:06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도서출판 길, 2010, 247-248
"그러나 우리의 고찰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언제나...모든 교파는 되풀이해서 종교적 '은총 상태'를 인간을 피조물의 타락성과 '세속'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종의 신분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분의 획득은 어떤 주술적, 성례전적 수단을 통해서나 고해에 의한 죄사함을 통해서 혹은 개별적인 경건한 공로를 통해서 보장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연적' 인간의 생활양식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특별한 종류의 품행으로 말미암은 확증을 통해서 보장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각 개인은 실천적인 삶의 방식 속에서 자신의 은총 상태를 조직적으로 검증하고 그것을 통해 금욕주의적으로 관철된 실천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할 동인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금욕주의적인 생활양식은...신의 의지를 지향하고 그에 입각해 개인의 현존재 전체를 합리적으로 형성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금욕주의는 더 이상 잉여 공로의 업적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자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실천 행위였다. 이렇게 해서 종교적으로 요구되는, '자연적' 삶과 구별되는 성도들의 특별한 삶이 - 이것이 결정적이다 - 이제는 더 이상 세속 밖의 수도원 공동체에서가 아니라 세속과 그 질서 안에서 진행되었다. 이처럼 내세를 지향하면서 세속적 생활양식을 합리화한 것이야말로 금욕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 개념이 낳은 결과였다....그런데 이제 기독교적 금욕주의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도록 수도원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북적거리는 시정의 삶 가운데로 들어가 바로 그 세속적인 일상적 삶에 자신의 조직적인 방식을 침윤시키기 시작했으며, 그럼으로써 이 삶을 세속 안에서 합리적인 삶으로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변형 과정이 세속에 의해서 혹은 세속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베버가 딛고 있는 지식의 넓이와 깊이는 압도적이다. 난 이제사 개신교 교파와 분파에 대해 좀 친숙해졌다. 교회사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베버의 본문과 주석을 통해 배우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시간을 내서 좀 따져보고 싶다.
이 책을 읽기 전, 그러니까 전설처럼 떠돌고 여러 인용을 통해서 알던 시절, 막연히 개신교 특히 칼뱅주의가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식의 조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더랬다. 그래서 칼뱅주의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더 별로 알고 싶지 않아지고 그렇게 공부를 하지 말아야 할 변명이 덕지 덕지 붙어서...읽어 마땅할 책들을 요리 조리 피해다니는데 도사가 되어간다.
아직 완독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전이해는 완전 오류였음이 판명났다. 베버는 칼뱅주의가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그러면 베버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이해에 따르면,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여러 분파들이 이제 까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형, 즉 자본주의적 정신을 갖춘 인간형을 탄생시켰음을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경제는 고대에서부터 존재해 왔지만 자본주의적 정신을 갖춘, 그러니까 하루 하루의 생존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온 삶을 체계적으로 조직화하여 노동에 전념하는 인간 그래서 근대 산업 자본주의와 친화력을 가지는 인간형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시대정신이던 시기, 칼뱅주의를 중심으로 한 여러 프로테스탄티즘 분파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본주의적 정신을 갖춘 인간형의 탄생에 기여했는가에 대한 논지 전개는 압도적이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부의 축적으로 위해 삶을 합리적으로 조직화하고 필요이상의 노동을 감내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직업과 노동은 내세의 구원, 그리고 그 구원의 확증을 위한 수단이었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순수한 종교적 열정으로 새로운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밝은 측면을 부각시키자면 기독교는 적어도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해 낼 잠재력을 가진 종교라는 말이 된다.
최근에 이름을 알게 된 캐스린 태너라는 예일의 조직신학 교수가 베버를 비판적으로 전유해 (아마도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이에 맞서는 기독교적 인간?) 중요한 논의를 이끌고 있는 것 같은데 (『기독교와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 태너가 주목한 것이 금융자본주의에 맞서는 '전에 없던 정신을 장착한 새로운 인간형의 창조'인지 확인해 보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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