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식민주의 성서비평
⟪탈식민주의 성서비평⟫, R.S.수기르타라자, 양권석, 이해청 옮김, 분도출판사, 2019
‘성서비평’도 어려운데 ‘탈식민주의’라니...앤서니 티슬턴의 ⟪성경해석학 개론⟫에서 처음 접했을 때...이건 접근하기 어렵겠구나하고는 도전해보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티슬턴의 ⟪성경해석학 개론⟫은 정말 비추다. 가독성도 떨어지고(번역의 문제일까 아니면 티슬턴의 문제일까?) 각 해석학에 대한 소개와 평가가 그다지 공정하지 않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의 책을 몇 권만 읽고나서 티슬턴의 피오렌자 해석학 소개를 읽으면 그의 성의없음과 ‘중립’을 가장한 편견을 금세 알아챌 수 있다.
나는 수기르타라자가 누군지 모른다. 사실 이 책도 내가 능동적으로 찾은 책이라기 보다는 동네 시립도서관 신착도서 서가를 살펴보다가 ‘성서비평’에 관련된 책이 꽂혀 있는 것에 감명받아 빌려온 책이다. 그런데, 이게 왠일...전혀 기대치 않았는데, 너무 재밌다. 글도 훌륭하고 번역도 훌륭하다. 공교롭게도 내가 최근에 성서해석과 관련해 자주 생각하는 지점들을 다루고 있었고, 덕분에 문제의식을 좀 더 명료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번 학기 히브리어 마지막 시간, 구약학 교수님이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에서 성서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불만과 우려를 피력하셨다. 해당 본문은 레위기 18장이었는데, 이 본문은 기독교 역사 내내 성소수자 배제, 혐오, 억압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어 왔다. 교수님이 비판하신 설교는 제사장/지배계급 권력 강화의 이데올로기가 레위기에 작동하고 있다는 이해 하에 레위기 18장을 비판적으로 읽고 해석하면서 성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억업과 폭력의 실체를 해체하려는 시도였던 것 같다. 구약학 교수님은 성소수자를 교회에서 배제, 혐오, 억압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분이지만, 성서를 억압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텍스트로 읽는다면 그 설교를 듣는 성소수자는 다시는 성경을 들추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정경’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것은 ‘위험’하다. 글쎄...정경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것이 어떤 면에서 위험한 것일까? 하나님에게 위험한건가, 기독교에 위험한 것인가 그도 아니면 대중성 확보라는 면에서 위험한 것인가?(성서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은 분명 한국 교회에서 인기있는 일은 아니다.)
성서의 권위에 대한 문제는 우리의 신앙의 여부와 등치되는 방식으로 우리의 관념을 강력하게 지배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 세계 많은 지역에선 기독교 신앙과 전통은 성서 텍스트 없이 지켜지고 전달되었다 . 전승 되어오던 수많은 복음서와 서신서들, 그리고 사본들 중 어떤 것을 정경으로 선택할 것인가의 기준은 정경 확정 당시에도 이견이 있었으며, 현대에 와서 정경화 작업에 착수했던 이들이 정경의 근거로 세운 ‘사도 저작’이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글쎄, ‘정경’ 안에만 갇혀 있는 하나님도 그리 자유롭지는 않으실 것 같다. 정경에 선발된 본문들도 전승되다(전승의 신뢰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전승과정에서 발생하는 변형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기록되었고, 기록된 것들은 오랜 시간 필사되었고(필사는 실수를 낳는다), 번역되었고(번역은 대부분의 경우 반역이다), 해석된 결과이다. 히브리어, 헬라어를 1년 정도 배우면 우리는 구약, 신약 본문이 얼마나 넓은 해석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지, 번역의 오류 가능성은 또 얼마나 큰지를 알아 버린다. 그렇다면...비판이 적용되어선 안된다는 그 ‘정경’은 무엇인가...
나의 구약학 교수님은 꽤 진보적이시고, 그래서 보수 기독교 집단에게 일종의 핍박도 받으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그분은 성서해석의 중심부에 나는 가장자리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가 닿을 수 없는 자리에서 성서를 읽으면서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그렇지 않은 것은 ‘틀린 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실 때, 나는 좌절감과 함께 미세한 분노를 느낀다. 왜냐하면 그가 구축한 세계의 옳고 그름에 굴복하지 않는 한, 나는 그의 ‘입장’에 영원히 설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왜냐고? 그가 가진 것을 나는 가져본 적이 없다. 만약 내가 태생적으로 주변부이자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다면, 나는 그들이 구축한 세계로 들어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는 척 하며 순응하는 대신, 주변부에서만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떠들며, 문제를 일으키고, ‘옳다’고 선언된 그것에 금지된 의심을 던지면서 그들을 심란하게 하고 싶다. 그런데, 이것을 좀 멋드러지게 하고 싶다^^;.
<탈식민주의 성서비평이 직면하고 있는 끊임없는 도전은 주변부 지위를 어떻게 유지하는가 하는 것이다. 가장자리에 서는 법과 아웃사이더가 되는 법 말이다. 학계에 속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위험이 있다. 대학들은 점차 비판자이기보다는 주주 자본주의의 협조자가 되어 가고 있다. 우리의 지식 생산은 시장의 요구에 맞춰지고 있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은 테리 이글턴의 말로 치자면 “정신의 경영자화”이다. 대학은 우리의 결과물이 끼치는 경제적 영향을 알고 싶어 하겠지만 지식은 경제적 이익보다 중요하다. 지식은 불편한 질문을 제기하고, 기존의 관념을 뒤엎고, 권력에 도전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아웃사이더의 딜레마를 통렬하게 포착한 바 있다. “나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쁜지 생각해 봤다. 그리고 가둬진다는 것은 더욱 나쁜 일일거라고 생각했다.”
탈식민주의 성서비평은 텍스트를 도덕적, 영적 저장고가 아니라 해석자들이 풀어야 하는 하나의 암호체계로 다뤄 왔다. 해석자들은 무고하다고 여겨지는 이야기들 안에 도사리고 있는 숨겨진 권력관계와 이데올로기들을 드러내기 위해 이 암호 체계를 풀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텍스트에 영적 자양분이 있을지라도 텍스트는 영적 자양분이 아니라 텍스트 안에 암호화되어 있는 반동적이고 헤게모니적인 가치들을 드러내기 위해 분석된다...우리는 텍스트와 함께 실로 엄청난 일을 해 왔다. 그러나 빛나는 텍스트 분석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적 박탈이나 잉여화가 극복될 수는 없다. 빈곤, 전쟁, 자살 폭탄 테러, 카스트에 근거한 살해, 인종차별, 성적 학대는 적절하게 해체한다면 사라질 수 있는 가상의 구축물이 아니다.> (⟪탈식민주의 성서비평⟫, 232-233)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탈식민주의 비평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서양의 확립된 기준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시선과 제국주의, 신식민주의의 공모. 이것을 비판적으로 직시하고 저항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탈식민주의 비평. 흥미로운 개념들과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완전 강추!!
우리 동네 도서관,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이 대출 가능하다고 검색된다. 책 빌리러 가야겠다.
◇ 여기 우리들의 신학 팟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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