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타자의 얼굴
나의 페미니즘적 사고는 어설프기 짝이 없다. 개념들은 애매하고 종종 모순되며 내뱉는 말들은 대개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거나 탈락한다. 그래서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부끄럽다. 그런데도 내가 속한 그룹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로 여겨진다. 일상에서 생각나는대로 느끼는 대로 말하는 것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벨 훅스의 표현을 빌어 스스로를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여튼, 그러다 보니 페미니즘의 이슈를 가지고 내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오늘 문득 이런 대화가 기억이 났다.
J: 페미니즘이 그러니까 인간해방하자는 거잖아요? 여성만 해방하자는거 아니잖아요? 그지요? 페미니즘이 자신의 의제를 보편적 인간 해방으로 설정한다면 남성들도 페미니즘 다 지지할텐데. 여성해방이라는 편향된 주장보다는 인간해방이라는 보편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 페미니즘에도 더 유리한 거 아닙니까?
J의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들, 특히 교회 남성들은 페미니즘하면 흠칫 흠칫 놀라곤 하는데, 그런 남성들을 페미니즘의 지지자로 만드는 것이 페미니즘 운동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그런데 나는 그에게 그렇게 답하지 않았다.
O: 아니요. 페미니즘은 ‘여성해방’이어야 해요. 페미니즘은 지금 '포괄'이 아니라 '전선'이 필요합니다. 여성이 '인간'이 되기 전에 섣불리 인간해방을 주장한다면, 보편적 인간을 가장한 남성 범주에 다시금 여성은 포섭될 것이고, 페미니즘은 빠른 속도로 힘을 상실하게 될 거예요.
그래. 페미니즘은 여성해방이 이루어진 뒤에 사라지는 것이 맞다. 노동해방, 인간해방이 이루어진 후 맑시즘이 아름다운 소멸을 꿈꾸듯.
‘보편’이라는 말...보편타당한 진리...라는 말은 내게 최근까지도 아주 매력적인 개념이었다. 막연하긴 하지만 ‘보편타당’이라 불리는 어떤 것이 내게서 실체화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러니까...보편타당한 진리의 담지자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누구의 보편타당인가? 내가 나의 것으로 내면화시켰던 보편타당의 기준은 어디서 온 것인가? 분명 나 스스로에게서는 아니다. 오히려 나의 생각과 의견과 행동들은 보편타당하지 않음으로 인해 비난받는다. 그렇다면 나의 것을 보편타당하지 않다고 규정하는 자는 누구인가?
철학사를 지배해 온 “주체 중심 동일성 철학”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면서 니체는 진리란 하나의 관점일 뿐이며, 남성 주체의 독단에 의해 주장되어온 하나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보편타당한 진리는 ‘보편’과 ‘주체’를 가장한 남성의 것이다. 그 보편과 주체에 여성은 속하지 않는다. 여성은 오히려 그 주체에 의해 파악되고 규정되는 대상이다. 파악될 수 없는 타자는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이 타자를 친숙한 존재, 이해가능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다. 그렇게 여성은 남성주체에 의해 멋대로 정의되고 표상된다. 그러나 정작 여성인 나는 그 정의와 표상에서 나의 정체성을 (당연히!!!) 찾을 수 없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라는 주체가 동양이라는 타자에게 행해온 ‘규정하고 지배하기’에 대한 책이다. 유럽의 동양 학자들이 동양을 어떤 식으로 신비화하고 또 열등하게 규정했는지, 식민 지배와 착취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오리엔탈리즘이 어떻게 효과적으로 작동해왔는지를 사이드는 자세하게 보여준다(유럽과 미국의 유수 대학의 동양학과들이 제국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나? 나만 몰랐던건가?!). 동양이라는 무한한 미지의 타자는 파악되지 않는 두려운 존재다. 그러나 동양학자들에 의해 규정된 동양은 파악가능한 그래서 자기 세계에 포섭되는 지배가능한 세계가 된다. 사이드는 직접 동양을 경험하는 서양인들에게 조차 동양학자들의 문헌이 제시하는 동양이 더 큰 권위를 가졌고 서양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렌즈를 통해서만 동양을 해석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도 비슷하다. 남성은 남성 저자의 문헌을 통해 여성을 배운다. 그렇게 규정된 여성은 깔끔하다: 여자는 이렇거나 저렇거나 혹은 이렇지 않거나 저렇지 않거나...그래서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마땅한 태도나 자세나 표정이나 말투를 가르쳐주고 싶어하나보다. 자신들이 여성에 대한 이해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스스로 여권지지자라고 믿고 있는 남성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여성들에게 어때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은 어떤 위대한 존재일거라고 말한다. 여성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그런데, 그가 여성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순간 여성은 또다시 그의 언어에 포섭된다. 그가 여성의 존재 당위성에 대해 어떤 신선한 말을 하든 그는 여성의 존재를 규정짓는 주체, 권위자가 되고 여성은 규정당하는 대상이 된다. 그들의 선의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담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가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우리가 어떻게든 잘 해보겠다고.
우리가 알 수 있는 타인은 없다. 타자는 그야말로 무한한 신비이다. 그 신비 앞에 겸손함이 필요하다.
내가 나를 알 수가 없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나를 안다고 말하는가...너에 대한 파악이 끝났으니 그래서 너는 더 이상 신비가 아니니, 나는 너를 이제부터 이렇게 대하겠노라고 말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금테안경>의 주인공 파디가티에게 가해진 모욕은 바로 여기...타인을 이해가능한 존재로 축소시킨 뒤 자기 마음대로 관계를 설정하고 행동하는 무례한 주체들에게서 시작된다. 파디가티와 페라라 주민들 사이에 존재하던 거리 조정에 파디가티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 그들이 그를 그런 존재(게이)로 규정하기 때문이며 그를 또 다른 주체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정체성이 한 존재의 본질일 수 있을까? 그것은 단지 우유(accident)에 지나지 않나? 나는 여성이기 이전에 사유하고 고민하는 인간이 아닌가? 하긴 본질과 우유를 구분하는 것도 어쩌면 남성중심적 철학 사유에 포섭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직은 정말 잘 모르겠다.
2020년 2월은 이상하다. 중국을 위시해서 우리나라, 일본, 몇몇 아시아 국가들은 신종코로나라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으로 나라 전체가 몸살을 앓고, 저 멀리 미국에선 <기생충>이라는 영화로 한국영화가 아카데미상을 휩쓸고, 나는 이 모든 것이 마치 꿈 속에서 벌어지는 일인 것처럼 관조하며 일상을 꾸려간다. 함께 공부하며 알게 된 친구는 페이스북에서 동물권에 대한 투쟁과 인천 엘로우하우스 투쟁을 알리며 연대를 호소한다. 동물권에 대한 주장은 내게는 너무도 낯선 것이어서 거부감이 있으나...난 이제 <육식의 성정치>라는 책을 천천히 읽으며, 내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먹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낯선 것이 나를 성찰하게 하고 내가 한계 지어놓은 윤리의 범주에 대해 재고하게 한다. 이런 것이 혹시 레비나스가 말했던 ‘타자의 얼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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