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선물 - 바울의 은혜 해석: 극대화 패턴의 변천 (10)
«바울과 선물» - <1부 제3장 바울의 은혜 해석: 극대화 패턴의 변천> (9)
6.1. E.P. 샌더스
홀로코스트 이후의 학자들이 유대교에 대한 기독교의 잘못된 해석을 비판하던 시기, 샌더스는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일차 자료들에 대한 대규모 분석을 통해 랍비 유대교를 “행위-의”의 종교로 보는 해석이 19, 20세기 학자들이 만든 경멸적이고 신학적으로 조직된 구조물임을 폭로하고 유대교에 대한 편견에 치우친 해석을 성공적으로 해체했다(이제 다시 유대교를 행위의 종교라고 비판하는 것은 가능해보이지 않는다). 샌더스는 팔레스타인 유대교 신학이 명백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했다.
샌더스는 종교의 유형들을 비교하기 위해 구원론에 초점을 맞추었고, 구원론을 순서의 문제로 규정했다. 종교(구원의 공동체) 안에 “들어가는 것(going in)과 그 안에 머무는 것(staying in)이 어떻게 이해되는지”에 관련된 질문에서 만약 택하심이 순종의 요청보다 선행하는 것으로 인식된다면 은혜의 종교라 할 수 있다. 샌더스는 율법에 대한 순종은 종교 유형의 필수 요소지만, 그것들이 전반적인 (구원의) 유형 안에서 어디에 위치하는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유대교에서 순종은 언약 속에 남아 있기 위한 조건이지 언약 속으로 들어가는 조건은 아니며, 순종이 구원을 가져오지 않고 게다가 완전한 순종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다. 샌더스는 유대교 문헌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율법 사이의 관계를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불렀으며, 에스라4서를 제외한 모든 유대 문헌에서 구원은 언제나 언약 속에 구현되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온다는 것을 확인한다. 샌더스가 유대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불렀을 때, 그는 우선성(은혜가 먼저 주어짐)에 기반해서 은혜를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바클레이에 의하면 샌더스는 은혜의 다양한 측면들을 구분하지 않은 채 아우구스티누스나 종교개혁적 전통의 특징을 지닌 용어들 즉 “완전히 값없이 주어지는”과 같은 은혜의 비상응적 용어를 은혜의 우선성 특성과 섞어 쓰는 경향이 있으며 이로 인해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랍비 문헌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논함에 있어 하나님의 은혜에도 호소하지만 이스라엘(조상들)의 공로나 가치를 언급하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상호 관련되어 있어, 하나님이 공정하신 분임을 보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즉 랍비들은 은혜의 우선성을 강조했지만 타당한 이유로 비상응적인 면을 극대화하지 않았으며, 이는 좋은 선물이 합당한 사람들에게만 차별적으로 주어진다는 고대의 가정과 완전한 조화(바울과 선물 1.2 참고)를 이루고 있다(271).
부지불식간에 은혜의 비상응성을 은혜의 필수적인 요소로 전제하고 있는 샌더스는 은혜에 대해 랍비들이 체계적으로 사고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바클레이는 샌더스가 ‘순수 은혜와 인간의 성취를 대조시킨 루터적 구조’를 의심하는 대신 공로라는 주제의 중요성을 경시함으로써 문제를 회피하려 한다고 비판한다. 바클레이가 지적한대로 “은혜에 대한 루터의 도식은 은혜의 하나의 형태”일 뿐이다(272). 은혜가 반드시 비상응적이어야 한다는 가정은 샌더스의 유대교 문헌의 은혜 해석을 난해할 뿐더러 은혜에 대한 명확한 정의의 결여로 인해 유대교와 바울의 차이점을 구분도 어려워진다. 따라서 이후에 제기된 ‘유대교과 기독교를 행위와 은혜의 대립으로 볼 수 없다면 바울이 유대교를 비판한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어지러운 논쟁은 이미 예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샌더스는 바울의 유대교 비판은 유대교 자체 내에 어떤 결함이나 잘못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는 그리스도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배타적 구원론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샌더스는 은혜의 우선성을 강조하지만 비상응성을 우선성 개념의 일부로 추정하는 경향이 있다. 또 제2성전 유대 문헌 본문들 간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은혜를 다룸에 있어 균일성과 일치성을 강조하고자 하면서 제2성전 문헌들을 획일화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샌더스 이후 제2성전 유대교에 대한 모든 설명이 바뀌었고 그의 주장이 폭넓은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란 어디서나 동일한 개념이고 한 극대화(우선성)가 반드시 다른 극대화(비상응성)를 수반한다는 인상을 남기면서 이후 논의에 혼란을 야기한 측면이 있다고 바클레이는 지적한다. «바울과 선물» 강독 때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바클레이의 주된 대화 상대자가 샌더스임을 감안하면, 바클레이의 이런 지적은 모호하고 애매해보이는 바울과 유대교 관계를 속시원하게 해명해 주리라는 기대를 높인다. (기대에 부응했는지와는 별개로).
6.2 바울에 관한 새관점
1) 스텐달
새관점의 출발점은 샌더스의 연구에 깊게 영향을 받아 바울과 제 2성전 시대 다른 유대인들이 은혜와 관련해서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의 입장은 무엇이며 이신칭의의 위치는 어디인가? 제임스 던은 칭의가 유대인들의 특수한 행위(민족적 지표)로 표시되는 식으로 유대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뜻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바울 연구에 일어난 깊은 수준의 변화는 크리스터 스텐달에게서 분명한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스텐달은 바울 신학이 모든 시대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가정을 비판하고 바울 신학의 역사적 특수성을 강조했다(역사주의의 영향). 역사적이고 해석학적인 이유로 스텐달은 “그때”와 “지금” 사이를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바울을 현대화하는 것에 대해 역사적 관점에서 반대했고 인간적 조건의 연속성 및 보편성을 전제하는 불트만의 추정을 의심했다. 새관점 지지자들은 스텐달의 주장에 기반해 바울의 칭의 신학이 이방인 선교라는 구체적 정황에서 그 선교를 옹호하고 촉진하기 위해 언급되었다는 해석을 내 놓았다. 바울의 신학을 초 시간적으로 일반화하려는 시도는 (특히 일반적인 구원론의 문제를 다룰 때) 부적절하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내내 은혜와 구원이라는 주제로 다루어진 로마서에 대해 스텐달은 그 서신의 주된 관심이 구원론이 아니라 선교론이라고 주장한다. 스텐달은 죄, 죄책,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 대신 집단들 간의 사회적 관계에 주목한다. 스텐달이 이해한 바울의 사유는 주로 개인의 영혼 및 양심의 내적 긴장(아우구스티누스, 루터, 불트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집단의 등장과 그들의 정체성의 문제로 인해 촉발된 것이다. 스텐달을 기점으로 은혜의 주제는 개인주의적 관심에서 사회, 정치적 관심으로 옮겨가고, 바울신학의 중심에서 은혜 주제가 밀려난다.
사회적, 정치적 관심을 지닌 바울 해석자들을 유대인-이방인 문제를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모두의 핵심 문제로 간주한다. 양 서신에서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는 사람 행위의 내적 태도(루터)가 아니라 문화적 전통의 사회적 실천과 관련되는 것이며, 이신칭의의 교리는 이방인 개종자들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들의 온전하고 참된 상속자가 될 권리가 있다는 특수하고 제한적인 목적을 옹호하기 위해 강조되었다(280). 이런 스텐달의 주장은 1960년대 부상한 사회적 가치인 평등성, 포괄성, 권리 이슈에 부응한다. 홀로코스트 이후 거친 비판에 맞닥뜨린 기독교의 반유대주의 사상 역시 스텐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스텐달에게 유대교는 기독교로 개종되어야 하는 소멸의 운명을 가진 종교가 아니다. 스텐달은 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이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유대인의 구원이 이방인들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와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 놓여 있음을 확신한다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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