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선물 - 바울의 은혜 해석: 극대화 패턴의 변천 (11)~(13)
«바울과 선물» - <1부 제3장 바울의 은혜 해석: 극대화 패턴의 변천> (11)
6.2 바울에 관한 새관점
(2) 톰 라이트
다른 학자들은 바울이 유대교의 일부 요소를 비판했지만, 이는 단지 유대교가 그것의 전통을 상실하거나 오해했던 경우라고 말한다(던, 라이트).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는 것은 유대인이 종교적(바르트)이고 경건(케제만)하며 율법주의적이라는 (샌더스 이전의, 루터 전통과 연결된) 고정관념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종교개혁 전통과의 결별과 바울 신학 내의 은혜의 위치가 재고되는 것을 의미한다(282-283). 톰 라이트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 들어가는 “동등한 조건”을 가지게 된 것과 이방인이 “2차적” 지위를 갖지 말아야 한다는 바울의 결정이 아브라함 언약의 갱신과 성취라고 본다(마틴이 반대했던 것). 이 갱신과 성취안에서 다민족으로 구성된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라이트는 이스라엘의 실패가 민족적 혹은 국가적 특권을 유지하기로 한 결정에 기인하며 이 실패를 그리스도가 극복했다. 라이트는 바울이 바로 이 결정에 대해 유대교를 비판한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거부하는 것은 “민족적 의”로 모든 민족에게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의와 대립을 이룬다. 라이트는 전반적으로 바울 논의의 중심을 은혜보다는 바울 선교의 보편성, 즉 유대교적 배타성과 편파성을 제거하는 것(F.C.Bauer의 주장)에 놓는다.
(3) 제임스 던
라이트와 달리, 던은 바울 논의에서 은혜를 중요한 주제로 다루지만 이 주제가 유대교와 대립을 일으키지 않도록 신중을 기한다. 바울 회심에 대해 논하면서 그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깨달은 바가 선민 사상의 오류이며 은혜(민족적 표지나 조건이 아니라)로 얻는 칭의의 진리였다고 말한다. 언약적 율법주의가 은혜에 관한 훌륭한 개신교 교리의 내용을 다 품고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던은 어째서 유대교가 터무니없는 선민 사상의 오류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를 이해하고자 애썼다. 바클레이는 던이 우선성과 비상응성 둘 다를 은혜의 본질적 요소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모순에 처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바울과 동료 유대인들이 은혜의 우선성에 있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만(그래서 둘 다 같은 은혜의 종교로 보인다) 비상응성에 있어서는 불일치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어느 하나가 은혜의 종교임을 증명하는 방식이 아니라(샌더스가 이미 둘 다 은혜의 종교임을 보였다) 각 저자가 은혜를 어떤 면에서 극대화하고 있는지, 왜 그런지, 그로 인해 도출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과 선물» - <1부 제3장 바울의 은혜 해석: 극대화 패턴의 변천> (12)
7.1 새 관점 그 이후
바울의 새 관점 학자들(NPP)이 바울과 은혜를 다루는 방식과 주장에 대한 일종의 이중 불만이 표출되고 있다. 첫 번째 불만은 NPP가 바울의 구원론의 지평과 의미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통일성과 평등성(NPP의 주된 주장)을 논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그 논의의 근거들이 여전히 일반화가 가능한 은혜와 믿음의 신학 안에 놓여 있다고 느낀다. 두 번째로 제기되는 비판은 은혜와 행위라는 주제에 대해 바울과 동료 유대인들 사이에 식별할 수 있는 차이가 전혀 없다는 샌더스의 주장에 가해진다. 많은 학자들이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한 분석은 설득력이 떨어지며 은혜의 본질적인 바울적 특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샌더스가 분석한 유대교가 훌륭한 개신교 교리를 품고 있다고 인정하는 던의 이해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D.A. 카슨은 제2성전 시대 문헌들에서 “공로에 의한 의”, “되갚음의 상호 교환”에 따라 작용하는 구원론의 단서들을 찾아내고 이것이 순전한 은혜와 대립되는 “공로 신학”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요소들은 샌더스 역시 발견한 것이지만 샌더스는 은혜의 우선성에 근거해 유대교를 은혜의 종교로 정의하는 반면, 카슨은 유대교의 공로적 요소를 은혜의 비상응성(그리고 비순환성)과 대립시킴으로써 유대교를 행위의 종교로 정의한다.
개더콜과 에스콜라는 언약적 율법주의 내에서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필수적이라는 점과 언약적 율법주의가 종말론적 심판에 구원론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연구했다. 만약 최종 구원에서 순종이 모종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은혜로 선택하셨다는 것이 구원의 포괄적 원리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은혜로 선택받고 순종으로 구원받는다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공로신학이라는 것이 개더콜의 주장이다. 카슨처럼 개더콜도 비상응성과 비순환성을 은헤의 본질로 전제하고 교환적 정의나 대칭적 심판과 대립시킴으로써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샌더스의 주장에 맞선다.
라토는 제2성전 유대교에서 인간의 성취가 중요했음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율법 준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유대교의 “신인협력설”적 특징을 지닌 구원론을 드러낸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유대교와 바울은 큰 차이를 보인다. 유대교가 인간의 자유와 율법에 순종하고 또 회개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낙관적 믿음을 지니고 있는 반면 바울은 인간 행위자가 성령의 능력을 입지 않는 한 스스로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능력이 없다고 여긴다. 바울이 인간의 행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본문이 있지만 이 역시 은혜가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활동을 대신할 행위자로 변화시켰을 때를 가리킨다. 라토의 바울 해석은 효과적으로 “신인협력설”의 여지를 제거하지만, 그와 함께 인간의 주체성과 책임이 설 자리 또한 제거한다.
샌더스와 새 관점에 대한 이런 반발이 일반적으로 종교개혁 전통에 속한 용어(행위의 의, 율법주의, 신인협력설, 공로, 오직 은혜)를 사용하고 있거나 암묵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논쟁에 호소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292).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에게는 루터와 칼뱅, 둘 중 한명 혹은 둘 모두가 찾고 있었던 은혜에 관한 모든 극대화(우선성, 비상응성, 비순환성, 유효성)가 존재하는 반면 제2성전 유대교에서 발견되는 은혜의 형태들은 ‘참된’ 의미에서 은혜라 할 수 없다. 그들이 보기에는 유대교 문헌들은 은혜를 주변적인 것으로 만들고, 희석시키거나 은혜와 보상이라는 대립되는 원리를 체계없이 혼합시켜서 은혜를 그와 대립하는 개념과 결합시켜 놓는다.
그러나 바클레이가 제시한 은혜의 극대화 개념에 근거하면 이들이 주장하는 ‘참된’ 은혜의 존재는 다분히 역사적이며, 은혜에 대한 (시공간을 초월하는)참된 정의를 주장하는 것 또한 정당하지 않다. 이런 방식으로 바클레이는 바울과 은혜, 바울과 유대교에 대한 토론을 “끝없는 펠라기우스 논쟁으로의 회기”에서 구해내고 좀 더 생산적인 토론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바울과 선물» - <1부 제3장 바울의 은혜 해석: 극대화 패턴의 변천> (13)
*프란시스 왓슨
F. 왓슨은 스텐달 이후 사회적・정치적으로 바울을 읽으려는 경향을 반영하며 바울에 관해 새 관점과는 다른 주장을 전개한다. 왓슨에 따르면, 바울과 동료 유대인들의 차이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구원의 원리(루터, 불트만, 케제만)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와 ‘삶의 중심을 율법 준수에 두는 공동체’의 구체적 존재에 있으며 이런 특수성은 은혜와 행위라는 일반적 원리로 환원될 수 없다. 왓슨은 유대교의 구원론 체계에 근거해서 볼 때 바울은 유대교와 다른 의견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사건을 기점으로 바울이 거꾸로 추론하고 있다는 샌더스의 확신(그리스도라면, 율법은 아니다)에 동의한다. 그러나 왓슨은 바울이 이차적(부차적) 수준에서 은혜라는 말을 상반된 문맥 속에서 사용하면서 그리스도-사건이 특수한 형태의 은혜를 나타내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음을 포착하고 이를 사회학적 관점과 성서해석학적 관점에 따라 설명하고자 한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은혜의 정적인 형태(태어나면서 종교를 갖게되는 경우:유대교)와 동적 형태(회심을 통해 종교를 갖게 되는 경우:그리스도교) 라는 차이가 있다. 은혜의 동적 형태에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경험으로 인해 은혜는 직접적이며 변혁적 특성을 가진다. 해석학적 측면에서 바울은 믿음(인간이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것)과 율법 준수(인간 행위의 결과) 사이의 중대한 차이를 찾아내는데, 이런 차이는 갈 3:11-12, 롬 10:5-8에 명확히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약속을 이해하는 바울의 독특한 해석을 볼 수 있는데, 그 약속들은 “먼저 주어졌을” 뿐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취소될 수 없으며” “일방적인” 것이다. 이는 구원을 율법 준수라는 인간 행위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는 것으로 제시하는 다른 모세 오경의 본문들과 대조를 이룬다. 왓슨은 행위 주체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는데, 그는 바울이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 행위를 절대적으로 대립하고 있지 않음을 강조하고 믿는 자의 주체성과 책임에 대해 신중하지만 명확하게 밝힌다(마틴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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