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N번방, 박사, 아이들

BundleE 2020. 4. 14. 13:47

n번방 사건이라는 것이 터지고, 박사라는 운영자가 구속되고, 그의 신상이 공개되고 포토라인에 서기까지 경악과 분노와 흥분의 상태가 이어졌다. 피해자 중 다수가 미성년 여성이었다는 것과 박사라는 자가 그들에게 요구했다는 엽기적이고 굴욕적이며 파괴적인 행위 몇가지만 듣고도 정신이 아득해졌는데, 이 동영상을 보기 위해 고액의 대가를 치른 수많은 참여자들과 그들이 쏟아낸 비인간적인 욕설들과 환호에 대한 기자의 설명에서는 귀를 막고 싶었다. 여성들은 두려움과 수치에 떨었고 박사라는 인간은 그들을 어떻게 휘두르면 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청소년 뿐 아니라 모든 여성 성범죄에서 “너의 이러 이러한 ‘짓’을 너의 부모에게, 너의 남편에게, 너의 아이들에게, 너의 지인들에게 알리겠다. 그러니 나의 모든 요구에 응해라”는 흔해 빠진 수법이다. 여성의 성에 있어서만 처녀성에 집착하고 처녀가 아니면 더러운 걸레라고 손가락질하는 모순된 사회와 문화가 여성들의 정신과 남성들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어 가능한 일이다. 아들의 성에 대해서는 개방적이면서도 딸의 성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면서도 모르쇠로 일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이 만들어낸 일이다. 딸들은 무지 가운데 속수무책 성착취의 피해자가 되었는데, 그들은 누구에게도 그 고통과 두려움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비난 당할까봐, 걸레라고 불릴까봐, 자신의 머리속을 가득 채운 형편없는 자기혐오를 다른 사람의 눈에서 확인하게 될까봐.

 

박사라는 사람의 신상이 공개되면서, 그가 이제 25살 청년이라는 것을 알게되자 나의 마음은 좀 복잡해졌다. 마음껏 분노할 수가 없고, 명치 쯤에서 알 수 없는 슬픔과 울분이 맴돈다. 어째서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사람이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고 말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삶을 선택했을까?

 

박사와 아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돈이 필요했다. 언젠가 한 방송에서 김영하 작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저소득 계층의 아이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저열하고 더럽고 잔인한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있다고. 그 곳에서 아이들은 중산층 어른들이 상상할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방식으로 잔인한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고.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불편하다고들 하지만 자신은 정말 많이 순화한 거라고.

 

오직 “돈”이 유일 가치인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은 “돈”과 자기 자신을 거의 동일시 한다. 성매매와 성폭력을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아마도 자신의 몸을 팔아서 대가를 받는 것에 대해 정당한 거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게 우리가 가르치고 배워온 자본주의의 원리니까. 박사도 돈이 필요했다. 그는 괜찮고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돈이 있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우리 사회의 한 일원일 뿐이다. 박사는 여성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여성을 자신이 상품화해서 팔 수 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을 상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무슨 거대악이었던 적이 있던가? 자본주의 사회는 그것이 생긴 이래로 한번도 여성의 성 상품화를 멈추어 본 적이 없다. 티비, 영화, 책, 인터넷, 버스 정류장의 광고판 어디서도 볼 수 있는 것이 상품화된 여성이다. 박사가 여성을 상품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학습의 결과이지 악마라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도 그런 사악한 존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 같다. 나는 그래서 어쩐지 그가 포로라인에서 했다는 “악마의 삶을 멈춰줘서 고맙다”는 말이 믿어졌다. 만약 그가 엄청난 부를 쌓아 자신의 계급을 바꿀 수 있었다면 그런 거추장스러운 죄책감따위는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왠지 양진호는 죄책감이라는 최소한의 인간성도 잃어버린 상태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어줍잖은 견해로는 자본주의의 진정한 승자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의 계급을 꿰어찬 이들에겐 죄책감이나 양심이라는건 존재하지 않는다. 성실, 양심, 준법, 죄책감 따위의 용어는 자본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평민들에나 해당하는 말이고. 작은 새만큼이나 법에서 자유로운 자들을 보라. 어떤 사람들인지. (고장자연씨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성범죄에 관련된 자들은 제대로 조사조차 받지 않고 있음을 잊지 말자.)

 

휴대폰 안 n번 방의 세상은 자본의 축적은 더 약한 것들을 착취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자본주의 원리를 날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사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가치는 돈에 있다는 믿음이 그 행위의 비인간성과 죄책감을 상쇄시키고 있었겠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악에 대해 생각할 수록, 그 악은 자본주의라는 생각이 확고해진다. 돈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그것에서 자유로우려면 돈을 소유해야 하고 돈을 소유하려면 나의 인생을 자본가에게 통채로 저당잡히거나(그러나 이건 엄연히 자유가 아니다) 아니면 나 역시 착취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이런 사악한 폐쇄 회로...

 

조주빈이 죄가 없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는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다. 그리고 마땅히 그가 행한 범죄와 그가 가한 고통에 준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가 무슨 악마적 존재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다. 내 안을 가만히 들여다 볼 때 나는 내 안에서 돈에 대한 악마적 욕구를 발견한다. 그것의 힘에 저항해 살고 싶어서, 성실, 양심, 준법, 죄책감과 같은 가치들을 지키고 싶어서, 그래서 공부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우리 사는 사회에서 교회가 이런 기능을 해주어야 할텐데. 자본주의와의 이데올로기 싸움의 최전선에서 자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하나님의 가치와 말씀을 선포하고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듣도록 우리 아이들이 돈 말고 더 귀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할텐데. 우리가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도록 용기를 주고 지원해주고 지도해주어야 할텐데. 교회의 목소리는 자본주의와 너무 닮아서 분간이 안가니 정말 써먹을데가 없구나.

 

그냥...나는 조주빈과 나의 공통점을 본다. 그래서 그의 삶이 철저히 파괴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벌을 통해 배우고 깨닫고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성경은 벌이 목적이 존재의 파괴가 아니라 교정과 회복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기회는 누구든 돌아오는 자에게 열려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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