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사건과 악의 문제
<n번방 사건과 악의 문제>
-'기독교 윤리' 중간 고사를 위해 제출할 에세이.
n번방에 대해 앞의 글들과 중복되는 면이 있으니 양해를 구한다. 이 사건을 신학적으로는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는지에 있어서는 약간의 발전이 있었던 것 같다 -
올해 가장 충격적 사건 중에 하나라고 하면 n번방을 빼놓을 수 없다. 국민적 공분이 뜨거웠고 이는 가장 많은 수의 동의를 이끌어낸 국민 청원으로 표현되었다. n번방의 운영을 통해 금전적 이득을 취한 자들만이 아니라 그 방에 가입해 돈을 내고 동영상을 본 자들까지도 가해자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으나 이에 맞서는 반대 주장도 제기되면서 우리 사회의 성착취, 성범죄에 대한 전반적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n번방 운영자들과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10대와 20대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 총선 직전까지 언론은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의 모든 것을 탈탈 털어 보도했고 그를 악의 축과도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언론과 대중은 그에게 비난의 화살을 쏟아부으며 마치 n번방이 성범죄의 유일하고 가장 극악한 형태인 양 법석을 떨면서 그에게 유례없는 최고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은 만 19세 미만 청소년은 신상공개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세 부따의 신상을 공개하면서 검찰과 경찰이 이번 사건에 많은 예외를 둘 것임이 시사되었다.) 정말로 우리는 이 사건만 일벌백계로 다스리면 여성에 대한 성착취와 성범죄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 것일까? 한 편으로는 n번방 가해자인 10대, 20대 남성들을 아주 특별하고 예외적 존재들로 만들면서 그들만 없어지면 될 것처럼 주장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피해자가 된 여성들이 비행 청소년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일까?
나는 이 사건을 보면서 리쾨르의 ⟪악의 상징⟫에서 배운 “허물”이 떠올랐다. n번방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이 잘못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마음껏 경악하고 비난한다. 가해자들이나 피해자들이 아주 특별하고 예외적인 범법자라는 인식, 나의 허물이 아니라는 믿음(나는 범법자가 아니다)은 “나는 깨끗하다”는 그래서 “나와 내 아이들은 안전하다”는 안도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이런 개인적 ‘허물’ 수준의 인식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악화시킨다. n번방 사건이야 말로 온 사회가 함께 저지르는 죄에 기반하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그 흠에 오염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깨끗하지 않다.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는 특별한 것은 조주빈이 아니라 무법천지가 판치는 사이버 공간이라고 지적한다. 인권보호를 내세워 확보된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이 처벌 받지 않을 권리가 있는 공간을 열어주었고 이 공간에서 디지털 세대 아이들은 쉽고 크게 돈을 벌 수 있는 불법적이고 탈규범적인 행위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이것도 어른들이 가르쳤다. 어른들은 오래 전부터 금전적 이득을 위해서라면 탈세, 주가 조작, 사기행각, 온갖 위법행위를 밥먹듯 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부자라는 사람들 그래서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중에 정직하게 돈번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성공하면 의로워지는” 세상에서 윤리가 무슨 배부른 소리인가. 아이들은 그저 자신들이 배운 것을 소소하게 실천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비윤리적 삶의 원리를 가르쳤고 범죄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우리 모두의 발이 죄에 잠겨 있으며 아무도 자유롭지 않다. 그것은 곧 누구든 가해자가 될 수 있고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한데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범죄의 경우 이 말은 이중으로 진실이다.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된 이 아이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가해자 조주빈이 인천 출신이란 것과 (온라인 상에서 벌어진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의 지역도 인천이 많은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이수정 교수는 2000년을 전후로 한 외환 위기에 많은 중산층 가정이 해체되면서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보호받지 못한 채 길바닥으로 내던져진 아이들을 주목한다. 소설가 김영하는 저소득층 가정의 아이들이 가족 내 권력관계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이며 집에서 쫓겨나 어린 나이에 독립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도 없이 길바닥으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은 생존하기 위해 가출 팸을 결성하고 돈을 벌기 위해 성매매를 경험하며 서로 간에 착취하는 구조를 가지게 된다. 아이들이 이렇게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생존을 강요당하는 곳 어디든 n번방을 능가하는 범죄의 가능성이 상존할 수밖에 없다. 2000년대 초반 재비행률 10%였던 청소년 범죄의 재범율이 현재는 40%에 이른다고 한다. 아이들이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해서 잃어가는 동안 우리 사회는 이 아이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방치하고 있다. 디스토피아 영화에서처럼 사회의 밑바닥이 될 비극적 운명을 가진 존재들을 사회가 만들어내고 있다. 영화에 대해서라면 즉각적으로 이런 비윤리적 상황에 반발 하겠지만 자신의 기득권이 달려 있는 현실 문제 앞에서 우리는 윤리적 질문 던지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윤리적 질문 어쩌고 하는 것은 너무 한가로운 얘기인지도 모른다. 이런 소외되고 방치된 집단/계층(?)으로서의 존재들이 사회적 안전, 시민으로서의 우리 개개인의 안전을 턱 밑에서 위협하고 있음을 이 사건이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우리와 우리 아이들 모두 이런 범죄에 노출될 수 있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간단한 일이다. 이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다.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편리한 분리선의 허구성과 기만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일이다. 사회적 계층간에 올라가는 일이 아니라 미끄러져 내리는 일이라면 우리와 그들 사이의 간격은 사실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우리는 언제든 그들로 전락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해야 한다. 문제가 심각한데도 평안하다면 그것이 더 심각한 문제다. 게다가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불안은 구원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불안은 위에서 밝힌 이유로 인해 지극히 세속적이면서도 또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지극히 신학적이다. 아이들을 범죄자가 되도록 방치하는 현실에 우리의 실존이 뿌리두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없다. 법으로 구체화되고 축소된 윤리적 요청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인식과 준법 수준에서 수월하게 얻는 양심의 자유에 익숙해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뻔뻔하리만큼 당당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의 언약관계에서 요청하시는 윤리적 요청은 ‘법과 정의’로 구체화되면서도 그것을 초월한다. 그의 윤리적 요청은 사회적 법을 준수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을 탐하지 말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까지 이른다. 이 신적 요청은 결국 공동체의 평화와 안전과 직결된다. 우리의 세속적, 신학적 불안은 우리의 변화와 실천을 촉구하고 있다. 이 불안이 모쪼록 우리와 교회와 사회에 구원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악의 상징⟫, 폴 리쾨르, 양명수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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