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ndleE 2020. 5. 19. 14:07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하나님께서 나누어주신 '본질'(esse)를 현실화하는 것, 잠재태를 현실태로 실현하는 것...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사람을 사람답게(좋게) 만드는 본질은 무엇일까?

 

나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었던 '사람다움'은 대부분 나의 사회적 역할을 둘러싼 의무의 완수와 그로 인한 도덕성 확보였던 것 같다.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죄책감은 아주 빠르게 '사람답지 못함'으로 연결되었다. 꽤 한참동안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이슈 '사람다움과 사람답지 못함'.

 

자식으로 해야 할 도리, 형제로서 해야 할 도리, 성도로서 해야 할 도리, 학생으로 해야 할 도리, 노동자로서 해야 할 도리, 여성으로 해야 할 도리...도리...도리...도리도리 그리고 점점 좁아져 가는 자유의 영역.

 

성서 역시 이와 비슷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꽤 오랫동안 믿고 있었다. 십계명이 그렇고, 율법들이 그렇고, 예수의 가르침이 그렇고...등등. 그런데 오늘 수업 중에 놀라운 것을 배웠다. 성서는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본질로 도덕성과 자유를 말하지만 둘 중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유'!! 성서와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와 루터 모두에게 자유가 도덕에 우선하는 인간다움의 핵심적 본질이라고 한다. (인간의 본질은 시대나 사회마다 다르게 규정된다는 사실도 충격이자 위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나는 나다움을 다 회복하지 못했다. 나다움의 회복은 "좋음"이며 하나님의 존재(esse)를 더 많이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나다움의 상실은 반대로 존재의 침식, 좋음의 상실이다. 아퀴나스는 이것을 나쁨, 악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기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면서 나를 가장 많이 괴롭히는 것은 내가 좋음이 아니라 나쁨을 행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다. 내가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내가 아끼는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는 것라고 느낄 때 그것이 '나쁨'이라고 여겨질 때 나의 선택(그리고 나 자신)은 아주 심각한 의심의 도마 위에 올려져 난도질 당한다.

 

아퀴나스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적 없고, 그에게서 위로를 받는 일이 생길 거라고는 더더욱 예상치 않았다. 뿌연 어둠이 내려앉고 있던 방에 딸깍하고 작은 필라멘트 전구가 켜진 것 같았다. 나는 나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그것은 사회적 기대와는 거리가 있고 많은 염려를 일으키지만 나다움을 회복해간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더 많이 가지게 되는 것이며 '좋음'의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다.

 

알고 싶어서 하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하다보면 자꾸 스스로를 의심하면서 이게 맞는 것일까, 삽질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을까를 계속해서 물어야 하는 전망이 불투명한 여성 신학생(게다가 만학도!!) 모두에게 이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목적하신 나다움의 본질을 현실화하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방향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주 괜찮은 것 같습니다. 간디가 그랬던가...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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