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 과잉의 시대
나의 선생님은 이번 학기 종종 이반 일리치를 언급하셨다. 나는 막연히 이반 일리치가 러시아인 일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사고 회로에서는 꽤 합리적 추정인데, 톨스토이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을 썼으니까 러시아에서 흔한 이름 아닐까? 선생님이 이반 일리치를 말씀하실 때마다 소설에서 읽었던 검사였던지 공무원이였던지...커다란 집에서 소멸되듯 죽어간 이반 일리치가 떠오르는데 선생님의 이반 일리치는 분명 사상가에 가까운 것 같았다. 문제는 이 둘의 이미지가 자꾸 포개져서 혼동을 초래한다는 것. (내가 이러고 있다는 것은 물론 선생님께는 비밀이다)
도서관이 다시 문을 열어서 대출가능한 이반일리치 책을 다 꺼내놓고 째려보다가 한껏 욕심을 내려놓고(!) 네 권을 대출했다.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텍스트의 포도밭⟫,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깨달음의 혁명⟫
반납 전에 다 읽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의 책을 내 방 어디쯤에 아무렇게나 놓아두는 것만으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와는 아주 말끔하게 분리가 되었다.
암으로 2002년 돌아가셨다는데, 암치료를 받지 않으셨다고 한다. 자신의 신념대로 산다 하더라도 치료 거부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일까? 삶과 죽음 모두가 사상이 되는 사람이라서 선생님이 많이 좋아하시나보다. 삶과 죽음을 일치시키는 것이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실천이 아닌가 (죽음이 삶을 배신하는 경우도 허다하고)
<간디의 오두막에서>라는 제목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세상이 그런 편의를 더 많이 지닌 사람을 우러러본다는 사실은 참 불합리합니다. 질병에 높은 지위를 부여하고 무지를 더 존중하는 사회는 부도덕한 사회이지 않습니까? 간디의 오두막에 앉아 이렇게 뒤집힌 현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니 슬픈 마음이 들었습니다...(21)
...부자는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부자’는 보통 사람 모두가 누리지는 못하는 삶의 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생활하고 먹고 다니는 것에서 ‘부자’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소비 양식으로는 진실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눈먼 사람들에게 간디는 이해하고 동화되기 어려운 명제가 됩니다. 이들은 소박함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 입니다...설령 진실이 보인다고 해도 부자는 그에 따라 살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이 나라의 영혼과 더 이상 접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만 사람이 품위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 또 산업화로 나아갈수록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은 아주 명백할 것입니다...(22)”
신학자이자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이 인물은 삶의 후반부에 많은 비판과 외면에 직면했다고 한다. 그가 자본주의와 개발지상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란다. 병원과 학교도 반대했다니...그 급진성이 짐작이 간다.
“건강을 위해서 병원에 의존하고, 교육을 학교에 의존하고
그런데 병원 수는 사람들의 건강 상태가 얼마나 나쁜지 보여주는 지표고,
학교 수는 사람들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주는 지표고.”
이 문장을 곰곰히 생각해보니, 병원과 치료의 과잉은 수긍이 간다.
젊은 시절 과도한 노동으로 어깨 관절에 변형이 와서 통증을 호소하던 엄마는 어깨 통증을 해결해 준다는 지방 대도시의 유명한 관절 병원에서 양쪽 어깨를 번갈아 수술받고 다인실 병실에서 똑같은 수술을 받은 아주머니들과 통증이 없어진 아는 사람 - 전설들을 나누고 희망에 차서 퇴원했는데 통증은 새로운 형태로 다시 돌아왔다. 몇년 후에 연골이 다 닳아 없어진 무릎 수술을 고려하면서 엄마는 어깨 수술의 실패 원인은 서울 병원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이라 결론내렸다. 그래서 이번엔 어린이 대공원 앞 용하다는 S대학 의대 출신의 선생님을 수소문해 상경 수술을 받았다. 이번에도 역시 양쪽 무릎을 번갈아 받느라 본인의 고통과 고생은 물론이려니와 다리 수술을 받은 환자를 수발하느라 아버지와 내가 번갈아 병실 침대에서 보초를 섰다. 벌써 2년이 지난 이야기인데 엄마의 무릎은 흉한 수술 흉터와 수술 자리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통증을 더해주었을 뿐 더 나아지지는 않았다. 더 나은 삶의 질을 제공하는 전능자처럼 엄숙한 표정을 하고 치료를 약속하지만 병원과 의료가 그런 존재인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공장처럼 찍어내는 어깨 수술과 무릎 수술의 현장은 오히려 공포스럽다.
학교는 또 어떤가? 학교가 사람들을 지적인 존재로 만들고 있는가? 학교는 아이들을 도태시키고 바보로 만든다. 아주 어린 나이에 아주 허접한 평가 기준에 의해 많은 아이들이 바보가 되고 루저가 된다. 학교가 없으면 아이들은 바보가 될까? 정규 교육을 마치고 교육의 허상에 사로잡혀 학위를 수집 중인 나의 경험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학교가 나를 가르치는 것이라기 보다는 내가 나를 가르치는 것이고 세상에서 내가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학위 수집중이냐...나의 배움을 상품화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한데 학위가 없으면 아무 것도 증명되지 않는 거지같은 현실 때문이겠지. 학교를 다니지 않고도 지적인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학력사회는 지성과 무관한 졸업증명서로 우월감과 열등감을 발생시키는 아주 우스운 곳이다(나는 그 우스운 곳에 완벽히 적응한 일인이고). 이반 일리치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바로 대학에 갔다고 한다. 그는 이 대학 저 대학에서 학위를 수집했는데 그가 학위를 수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유대인으로 나치 시대에 생존하려면 능력의 여러 증명서 혹은 신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세계는 지금>이라는 프로를 최근 들어 열심히 보는데, <세계는 지금> 아마게돈 급의 재해로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대고 있다. 환경의 역습은 아주 오래 전부터 회자되던 말이지만 그 단어가 이렇게 눈 앞에 무시무시한 규모로 벌어지고 있는 것을 화면으로 지켜보고 있자니...내일의 일을 염려하는 것은 오히려 한가한 소리라는 생각이 든다. 내일이 나에게 오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그냥 오늘 환경에 누를 끼치지 않고 소박하게 하루를 살기를 소망하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오늘은 핑계 김에 샤워와 머리감기는 건너띈다. 언제부터 인류는 이렇게 씻는 것에 집착하게 되었는가...소비하는 것으로 나를 증명해야 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좀 더 저항해 보기로 한다.
고작 몇 페이지 읽지도 않았는데, 금세 고매한 척이라니...품위있는 삶과는 거리가 좀 있다.
여기 우리들의 신학 팟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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