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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적인 '주체성' 본문

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허구적인 '주체성'

BundleE 2020. 12. 4. 18:52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주체의 이러한 모습이 문명에서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적 행위라고 말한다. 체계의 완벽한 요소로서 존재하는 '완벽한 주체'는 합리성에 근거한 자유 의지, 보편적 가치에 근거한 선, 그리고 정의 등의 이름으로 '스스로'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즉 주체의 자기 결정권은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자기 유지'를 위한 계몽된 인간의 선택사항이다. 이는 공포에 기반한 능동적 선택사항이다. 자기 유지의 양자택일은 지배할 것이냐 지배당할 것이냐의 문제, 나아가 생존이나 파멸이냐를 선택하는 절박한 순간에 놓이게 된다...근대의 주체는 자기유지의 강박에 사로잡힌 계몽된 주체로서 '참'을 수행하는 존재로서 수행적 주체가 된다.

 

권순정(2013)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을 통해서 본 젠더" 철학논총 72, 2013.4, 215-240 (225-6)

 

한 주에 한 절 히브리어로 룻기를 함께 읽는 학문공동체가 있다. 나에게 이 모임은 히브리어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나의 의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한 절 히브리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한시간을 훌쩍 넘어가는 토론으로 이어지곤 한다. 룻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렇게 읽어도 되는가, 이런 해석도 가능하지 않은가, 그럼 권위자에게 물어볼까? 배가 고프니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이번 주 토론 후 머리에 남은 단어는 '주체성'이었다. 룻이 선택했고, 그 주체적 선택을 허용하는 룻기는 여성 우호적 본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로 읽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가라는 의견이 있었다. 나는 그 '주체성'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에도 그 말이 힘 없는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가 선택한 거잖아." 선택은 종종 불가피한 책임의 문제로 이어진다. 손가락 개수 만큼의 선택지도 갖지 못한 사람들, 봉건적 농노에서 벗어나 근대적 개인이 된 하층민들이나 인식의 틀에 포착되지도 않는 서발턴들에게 선택했으니 당신이 처한 현실에 책임도 지라는 뻔뻔하고 무자비한 사회. 이들에게 선택적으로 붙여지는 '주체'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호칭이다.

 

진정한 주체, 진정한 자유,진정한 선택이라는 사치가 인종, 성, 계급, 나이 등의 교차적 억압을 경험하는 자리에 놓인 룻에게 허락되는가? 그녀의 선택을 칭송하고 자비롭고 현숙하다 말하는 내러티브가 과연 룻과 같은 처지의 여성들에게 해방적 힘으로 작용하는가, 규율과 복종과 억압으로 작용하는가? 가치 기준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지배자이지 피지배자가 아니다. 그 기준은 지배자를 위해 피지배자를 길들이고 순응하게 만들 뿐 그/녀를 자유롭게 놔주지 않는다.

 

매번 나는 나오미와 보아스를 빌런으로 만드려는 사람으로 비치나보다. 이번 주엔 3:11 에쉐트 하일을 '유력한 남자의 여자'라고 해석했다가 꼭 그렇게 해야 속이 시원하냐?! 라는 핀잔을 들었다. 난 그렇게 읽혀서 그렇게 읽은건대 보통은 '현숙한 여인'이라고 번역한단다...흠... 난 나오미와 보아스를 빌런으로 룻을 희생자로 만드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전형적인 인물들과 내러티브의 여러 요소들 속에 묻어들어가 있는 이데올로기적 작동에 관심이 있을 뿐. 나오미와 보아스가 무슨 죄가 있는가? 그들은 본문 뒤의 저자나 공동체의 관심을 표현하는 작품의 인물들일뿐인데. 원문을 함께 읽어나가는데도, 나는 해석이 아니라 번역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의견의 차이가 매우 커서 놀라곤 한다. 그렇지. 번역도 투쟁의 장이지.

 

주체에 대한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버틀러의 분석이 '주체'라는 말에 대한 나의 막연한 불만을 좀 또렷하게 해 주었다. 주체, 자유, 능동적 선택과 같은 말들은 얼마나 허구적이고 기만적인가...

 

이런 논의들을 좀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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