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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전승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 본문

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신약 전승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

BundleE 2021. 1. 15. 17:00

<신약 전승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

 

신약 27권 중에 나타나는 온갖 쟁점에 대한 다중적인 목소리, 이런 다양성은 서로 다른 저자 사이에서 혹은 같은 저자 안에서 발견된다. 이런 문제에서 신약이 일관된 목소리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함의할 수 있는가?

1. 정경 내부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한 목소리를 택해 정경으로 작용하게 하고 다른 목소리에 인위적으로 입마개를 씌우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헌신하고 실천하기에 가장 부합하는 성경의 일부를 부각시키면서도 우리에게 가장 진지한 질문을 던지거나 도전하는 성경의 일부를 바깥 어둠 속으로 밀쳐 버리기로 선택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런 서로 다른 목소리는 서로 다른 사회 역사적 상황에서 서로 다른 도전에 직면한 개인과 공동체를 위해 복음이 갖는 의미를 이끌어 내려는 시도가 이미 신약 시대 안에 있었음을 반영한다. 상황 문제에 민감하다는 말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메시지가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2. 신약 속 서로 다른 목소리는 건설적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목소리가 균형을 깨지 못하도록 다른 목소리가 때때로 커져야 하고,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계속 그들의 목소리를 각각 들어야 한다.

3. 신약 안의 다양한 목소리는 '서로 사랑하기'와 '하나 됨'과 같은 일관된 가치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합의'를 일관되게 경험하는 것과 동일시 될 수 없다는 현실을 증언한다. 가끔 우리는 신약 시대의 교회가 온갖 종류의 신학적 쟁점과 도덕적 관심사에서 폭넓게 일치를 이룬 단일체였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원시주의(primitivism)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장면은 신약 안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신약이라는 모음집에서 우리는 오늘날 다양성의 한가운데서 더욱 신실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데 더 없이 필요한 자원을 발견할 수 있다.

텍스트의 전유는 예술, 과학 ,상상을 통한 텍스트의 참여가 한 부분을, 텍스트와의 비판적 담화가 다른 한 부분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숙련된 성서학 방법론은 마지막에 조정되거나 제거되어야 하는 벽을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세워 놓는 방식으로 이 과정을 돕는데, 이는 어떤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이 벽이 독자로부터 텍스트를, 텍스트로부터 독자를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견하고 싶은 것을 성경에서 발견하고 우리 자신이 세운 가정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신약에 강요하는 성향이 우리에게 있음으로 텍스트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 텍스트로부터 우리가 보호받을 필요도 있다. 신약 텍스트의 메시지가 우리 자신의 상황과는 다른 상황에서 유래하는 한, 그 메시지가 우리의 현재 정황 속에서 직접 말하게 할 경우, 가끔 허튼소리가 되거나 대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조엘 그린, <신약 전승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 『IVP 성경비평주석 신약』, 제임스 던 편집, 이철민, 홍성수 옮김, IVP, 서울, 2020), 71-97쪽: 95-96

 

*성서의 해석에 깊은 관심과 열망을 가진 성서의 독자들과 신자들에게 성서는 어떻게 접근되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균형잡힌 지침인 것 같다. 성서해석이 어떤 긍정적 결실을 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현재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전유를 막기위함이라는 부정적 의미의 해결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

 

*흥미롭게도 최근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을 여기저기서 접하게 되는데 그린 조엘은 이렇게 말한다. "결국 실천이나 행동은 '아비투스와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구체적인 사회적 맥락의 상호 작용에서 자라난다. 이 모델이 해석학 과제와 직접 관련되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특정 방식과 관련해 사람의 성향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는다. 신약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성향'을 개혁는가? 그리고 이것은 세상 속 우리의 실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94쪽)

 

만약 아비투스가 절대로 바뀌지 않는 어떤 고정값이라면 그것을 분석하고 논하는 것 역시 사회적 모순과 불평등을 고정시키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부르디외가 분석의 의미로만 아비투스를 논한 것은 아니다. (성서의) 해석공동체, 신앙공동체는 '약한 자, 억압받는 자의 하나님'의 꿈을 공유하고 그것을 우리 안의 실질적 아비투스로 형성하고 실천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다양한 아비투스를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들은 새로운 공동체로 부름받고 하나의 그리스도, 하나의 성령안에서 너희도 하나가 되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 부르심이 공통의(교집합적인) 아비투스 형성을 통해 응집력을 형성하면서도 각기 다른 아비투스가 다양하게 유지되는(아비투스의 세상적 서열화가 전복된 상태에서) 이상적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나역시 부르디외의 상징자본(과 김홍중의 꿈자본), 그것이 성서해석과 신앙공동체에 가지는 파괴와 구성의 힘에 관심이 많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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