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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의미"에서의 톰 라이트 본문

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예수의 의미"에서의 톰 라이트

BundleE 2021. 4. 5. 17:02

마커스 보그와 톰 라이트가 역사적 예수에 대해 논쟁한 책, 『예수의 의미』를 읽고 있다. 3부 예수의 수난과 죽음까지 읽었는데...예수의 죽음에 이르자 톰 라이트의 글이 점점 더 참기 어려워진다.

예수는 자신을 하느님의 구원사 가운데 절정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현실로 구현되리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라이트는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바르 코흐바를 예로 든다. 바르 코흐바가 품었던 소명의식을 예수라고 품지 않았을리 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바르 코흐바에게는 그를 별의 아들이자 성서에 예언된 그 메시아라고 말해준 랍비 아키바가 있었다. 로마에 맞선 유대 해방 전쟁에서 그가 지도자가 되어 주길 열망하던 민중과 랍비 아키바의 지지가 없었더라도 그가 스스로를 메시아라 생각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하다.

예수의 재판 내용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신뢰할 수 없다는 마커스 보그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라이트는 유월절 당시 예루살렘은 소문이 확산되기에 적절한 조건이었고, 메시아적 인물로 주목받고 있던 예수의 일거수 일투족은 어떤 식으로건 새어 나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것이라 주장한다. 우간다의 대주교 야나니 루움의 독재 정권에 의한 은밀한 죽음에 관련된 세부사항이 신속하게 대중에게 알려진 것이 예수의 경우와 유사한 예로 제시된다. 정말로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었는가는 정당한 의문에 붙여질 수 있다. 시골 가난한 계급 출신의 아버지마저 모호한 예수라는 젊은이가 제사장 집안 출신인 세례 요한보다 대중으로부터나 지배계층으로부터 더 큰 관심을 끌었으리라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다시피 세례 요한은 아무런 재판없이 처형되었다. 학자들이 유월절 새벽에 이루어진 산헤드린과 로마 총독의 재판을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이유일 것이다. 게다가 대제사장의 뜰과 로마 총독의 공관 내부에서 이루어진 재판이 "보도"되려면 목격자 중 예수의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서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그 자리에 없었고, 내부자들은 예수의 정체성이나 소명 따위에 관심이 없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반면 우간다의 대주교는 독재정군에 맞선 "대주교"였다.

라이트는 "~능력이 없었다고 짐작할 이유가 없다. ~라고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라는 식의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한다. 추론의 추론이 반복되지만 자료상의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다. 예수의 소명이나 행위를 설명하거나 다른 의견을 반박할 때 "이상한"이라는 형용사를 자주 사용하는데 학문적 글쓰기에서 "이상한"이라는 형용사의 잦은 사용이 너무 이상하다고 느꼈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소명을 가지고 죽음을 향해 갔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라이트는 알버트 슈바이처를 인용한다. 알버트 슈바이처가 역사의 수레바퀴가 전진하도록 만들기 위해 예수가 자신을 던졌고 그 굴러가는 바퀴에 그의 몸이 으깨졌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슈바이처에게 이런 예수의 소명의식과 자기파괴적 행위는 철저한 실패를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해방도 하느님의 통치도 도래하지 않았다. 반면 라이트는 예수의 죽음이 실제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완성했다고 본다. 그들은 해방되었고 하느님의 통치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독자로서 이러한 선언과 현실의 간극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나는 여백에다 그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떻게 설명하지...?라고 적었다. 물론 라이트는 예수의 싸움이 보이지 않는 궁극의 적, 악의 세력, 사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탄의 궁극적 패배로 인해 하느님의 통치가 도래했고 예수의 사명은 성공적이었다.

우리가 만약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예수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드디어 실현된 하느님의 통치에서도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고 악은 줄어드는 대신 증식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들여다봐도 그렇고 기독교가 지배하던 세계를 들여다봐도 그렇고 세속화된 오늘날의 세계를 봐도 그렇고. 하느님의 통치의 의미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나? 라이트의 신앙심 넘치는 예수 죽음의 해석에서 더 큰 절망을 보게 되는 아이러니.

언젠가 신약 선생님께서 라이트의 책은 거의 주석이 없어 학문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말씀하셨다. 나 역시 라이트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각주를 좀 주면서 이야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학문적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독자에 대한 예의로 말이다. 대부분의 각주는 자기 자신의 책을 참조하라는 것이었고, 나머지는 또다른 자신의 주장이었다. 물론 그가 자격을 갖춘 학자이기에 이렇게 책도 많이 출판되고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겠지만,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들을 동어반복적으로 전개하면서도 독자에게 그 주장의 근거를 제시할 의무를 느끼지 않는 저자의 오만함에 또...왈칵 울화가 치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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