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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들의 신학
성서해석의 윤리 본문
"당시는 천진난만한 시대였으며 그래서 역사가들은 자신들을 가려줄 한 조각의 철학도 걸치지 않고 역사의 신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부끄러움도 없이 에덴 동산을 돌아다녔다. 그때 이후 우리는 죄를 알게 되었고 타락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역사철학이 필요없는 척하는 역사가들이 나체촌의 주민들처럼 교외의 전원주택지에 에덴 동산을 재건해보려고 애쓰고 있지만, 그것은 남의 눈을 끌어보려는 쓸모없는 짓일 뿐이다. 오늘날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그 거북한 질문은 더 이상 회피될 수 없다."(33)
『역사란 무엇인가』, E.H.카, 김택현 옮김, 까치, 2015
꽤 오래 전에 읽기는 시작했던 것 같은데 마치지 못한 이 책을 이번에는! 진득하니 읽어보려고 한다. 그런데 1장부터 이런 문장이 있었다고?! 라는 탄성이...역사가의 이토록 유려한 문장이라니...질투가 난다...
카는 19, 20세기의 영국역사가들이 역사철학에 끌려들어가기를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역사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의미란 절대적이고 자명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서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에게 사실 모든 문장은 성서 해석에 관한 것으로 변환되어 입력되는데 이 문장 또한 그러했다. 성서해석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우선 성서를 현재의 모습으로 만든 다양한 저자들이나 편집자들에게 그들만의 "역사철학"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성서에서 역사와 의미를 끌어내고자 하는 해석자들은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불어 해석자의 "해석의 철학 혹은 역사철학"또한 분명한 방식으로 의식해야 한다. 너무 오랜 시간 성서해석에서 해석자의 자리에 대한 표명이 필요없는 것처럼 여겨져 왔던 것은 아마도 성서가 자명한 어떤 단 한 가닥의 진리로 꿰어질 수 있다는 순진한 때로는 기만적인 믿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순진한 성서해석의 불가능성과 기만성이 폭로된 이후, 해석자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누구의 편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은 성서해석의 일종의 윤리라 할 것이다. (성서해석의 윤리와 윤리적 성서해석은 다른 것 같다.)
어제 청어람에서 마련한 <페미니즘 관점 성서 해석, 듣기? 아니 하기!>에서 모인 분들과 함께 이런 방식(역사비평적 페미니즘 성서해석)으로 성서를 볼 수 있다(혹은 봐도 된다)는 것을 들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방식으로 다른 관점으로 성서를 읽는 경험을 통해 해방감을 경험했다고도 했다. 나 역시 동일한 경험을 거치고 있으며 이런 경험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동질감에 매우 기쁜 시간이었다.
공부를 하다보면 문득 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자괴감이 압도한다. 세상은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책들의 세계와는 전혀 무관하게 돌아가는데 현실과 동떨어진 망망대해에서 고도가 아니라 익사를 기다리는...이것이 자살 행위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하는 불안과 절망의 수중기로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임을 통해 내가 하려고 하는 공부가 어딘가에는 분명 쓸모를 가질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갖게 된다. 멀리서 깜박이는 희미한 불빛이라도 나와 같은 이들에겐 표징이 되고 이정표가 되는 것일까? 많은 이들이 그렇게 작은 불빛에 소망을 걸고 타박타박 걸어가는 중이겠지? 내가 처음 신학을 계속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던 자리에서 가졌던 고민을 여전히 많은 이들이 하고 있으니 조금 더 힘을 내봐야겠다.
여기 우리들의 신학 팟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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