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모종의 도덕적 기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 몇몇 장면들이 있었다.
-얼마 전 로마서를 같이 읽는 수업에서 선생님이 동성애 관련 본문,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동성 성행위를 악으로 규정하는 두 구절(롬 1.26-27)을 1세기 그리스-로마의 자연에 기반한 철학적 이해/견해 위에서 읽는 것의 의미와 자연에 대한 진보된 이해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셨다. 다양한 신앙적 배경을 가진 수강생들을 의식하셨던 것인지 아니면 1세기 문헌을 읽고 해석하는 행위의 기본적 자세를 전달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으셨던 건지 다소 결연해 보이시까지 했다. 내게 사실 이 구절에 대한 성서학적 해석은 이제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이었지만 컴퓨터 화면 속에 흐르던 긴장은 좀 놀라웠고 어느 정도는 흥미진진했다.
정말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가 시대를 초월한 "악"이라고 믿고 있는 것인가? 그들에게 "악"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김기홍 활동가와 변희수 하사의 죽음은 사회의 좁다란 인식과 이기심에 공모한 우리가 예수께서 목숨 바쳐 사랑하는 존재들을 질식시키고 살해하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게 한다. 트랜스젠더 아이를 둔 부모들은 내 아이는 아직 살아 있는지 확인하면서 죄책감과 불안으로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다른 한 편에서는 예를 들어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이상민 의원 지역구 사무실에 몰려들어 격렬하고 끈질기게 법안을 포기하게 하려는 기독교인들의 시위가 있다. 이들은 동성애를 허용하면 교회가 무너지고 사회가 타락하고 국가가 망할 것이라 믿는 듯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정의의 편에 서 있다는 데 추호의 의심도 없는 듯 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죽기 살기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했다. 누가 그들을 그토록 절박하게 만들었을까 누가 그런 망상을 그들에게 주입하는 것일까...보수 기독교의 신학과 목사들이 흔히 쓰는 용어들이 그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런 이야기(페미니즘적 의견)를 하면 교회 청년들이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 같다고 지적해요"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는 누가 정하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 진리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은 좋게 말하면 진리가 아닌 것이고 심하게 말하자면 거짓 혹은 '악한 인간의 말'이다. 정의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나 어떤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라 각 교회의 전통에 익숙한 또다른 인간의 언설에 가깝다. 전통에 물든 언어들이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일테면 페미니즘과 같은 새로운 관점/인식의 언어가 소박한 역사를 가지고 있음, 그래서 매우 낯설고 서먹하다는 것은 인정해야겠다. 그러나 길고 짧다는 특징을 제외하면 둘 다 '역사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오래 묵는다고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역사적'이라 말 자체가 변화와 운동을 가리키는 것도.
E.H. 카의 문장은 이런 상황과 겹쳐져 마치 성서의 말씀처럼 다가왔다.
"우리가 역사나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도덕적 교훈들은 은행의 수표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인쇄된 부분과 써넣을 부분이 있다. 인쇄된 부분에는 자유와 평등, 정의와 민주주의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이 있다. 이 단어들은 필수적인 범주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에게 얼마나 많은 자유를 배당하려고 하는가 ,우리가 누구를 우리와 동등한 사람들로 인정하며, 어느 정도까지 인정하는가 등을 말해주는 또다른 부분을 채워넣을 때까지, 그 수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우리가 때때로 수표에 기재하는 방식이야말로 역사에 관한 문제이다."(E.H.Carr, 『역사란 무엇인가』, 김택현 옮김, 까치, 114)
절대 악, 초월적 진리,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단어들은 초역사적인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것처럼 내뱉어지지만 사실 그런 거대한 단어들을 이용해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자신의 구체적 이득을 위해 살아있는 (자기보다) 약한 존재들에게 돌 던지는 찌질한 짓이다. 돌팔매가 살해에 이르기에 극악무도한 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도 자유와 평등, 정의와 민주주의처럼 은행의 수표와 같다. 인쇄된 부분에 하나님의 말씀, 진리라고 쓰여 있지만 우리가 채워넣야 할 빈 곳이 있고 이 빈 곳은 우리가 서있는 역사와 사회 그리고 구체적 현실 속에서 우리가 누구에게 얼마나 많은 자유와 권리를 배당하는가, 우리가 누구를 우리와 동등한 사람들로 인정하고 어느 정도까지 인정하는가를 채워넣기 전까지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 빈 곳에 가난한 병자, 죄인, 세리, 고아, 창녀, 부랑자, 나그네, 사회적 약자들을 채워넣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선포한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라는 수표에 예수의 제자라고 자부하는 우리는 무엇을 채워넣었는가? 부디 그것이 그 수표의 인쇄된 부분에, 수표를 쓰는 이의 정체성에 걸맞는 것이기를...
여기 우리들의 신학 팟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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