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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선물 - 바울의 은혜 해석: 극대화 패턴의 변천 (5)~(7) 본문
«바울과 선물» - <1부 제3장 바울의 은혜 해석: 극대화 패턴의 변천> (5)
3. 루터
3.2. 율법의 행위가 아닌
“율법 행위”가 지닌 문제에 있어 인간의 완고한 욕망에 강조점을 두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루터는 인간의 관계, 즉 자기 자신, 행위, 그리고 하나님과의 실존적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187).
루터는 죄의 근저에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깊은 욕망과 오만한 자기신뢰가 놓여 있으며,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라고 주장했다(188). 바울에게 율법의 행위는 구약성서 율법의 일부 “예식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십계명과 하나님의 도덕법을 포함한 율법 전체를 가리킨다(189). 그런데 만약 바울이 가장 완벽한 율법에 의한 칭의를 공격한다면, 그 공격 대상에는 모든 율법의 행위와 교회가 제정한 규칙들도 포함되며, 이런 해석은 가톨릭의 공로주의와의 싸움에서 상당히 유용했다(189,190).
루터는 바울이 반대하는 “율법의 행위” 에서 행위의 내용이나 행위자가 아니라 행위의 “의미”에 주목하는데, 자기 자신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무지나 오해가 불경건한 이해, 동기, 태도(행위의 의미)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190). 바울 신학에 대한 이런 해석은 전통의 권위만이 아니라 교황의 권위까지 행사했던 교회 관습들의 타당성을 둘러싼 논쟁으로 발전했는데, 그는 면벌부 비판을 시작으로 다수의 관습들을 비판하면서 이 전통들의 동기가 “행위” 신학의 노예화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190). 루터의 주장은 신자들에게 특정 행위를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교회의 권력과 함께 경건의 등급개념도 무너뜨리기 시작했으며, 은혜를 얻기 위한 공로의 능력에 전념했던 많은 교회의 관습들을 상대화시켰다(192).
바울의 은혜 신학 안에 모든 형태의 교회 권위를 전복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 루터에 의해 분명해졌다(192). 루터에 의해 발견된 바울의 은혜 신학의 전복적 힘, 지금 우리들 교회 어딘가에서 임계치 도달을 기다리며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는걸까?
«바울과 선물» - <1부 제3장 바울의 은혜 해석: 극대화 패턴의 변천> (6)
4. 칼뱅
칼뱅은 전체 정경을 바울적 렌즈를 통해 읽고, 바울의 주제로 구성하고 채색한다. 그는 루터와 멜란히톤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대가없이 아무런 공로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의존하여 선택된 자들의 예정 및 견인에 나타나는 은혜의 유효성을 추적한다(루터는 이와 달리 은혜의 유효성과 예정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더불어 칼뱅의 섭리와 신적 자비의 신학은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보여준다. 칼뱅 신학은 칼뱅의 고전에 대한 이해와 내구성 있는 교회적 경건을 구축하고자 하는 그의 목적을 염두에 둘 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교황주의자들”과의 싸움에서 칼뱅은 그들의 견해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바울의 대적자들을 하나로 묶는 전략을 썼다. 칭의를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지(프로테스탄트) 아니면 행위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제공하는지(가톨릭)의 여부에 있어 칼뱅은 우리의 모든 의는 그리스도에게 귀속된다는 주장을 편다. 그는 인간의 의가 구원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자기기만적이라 보았다. 칼뱅에게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으로 완벽하다. 자신이 의로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실존의 중심을 잘못 조정(루터의 자기신뢰)한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그 어떤 의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견딜 수 없다는 객관적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자기기만)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고” 또 “완전한 순종”을 보이셨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져 있는 한에서만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 질 수 있다. 칼뱅의 신학에서 그리스도 사건의 목적은 의롭고 거룩한 피조물로 다시 지음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로운 자비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루터는 구원의 내적 믿음과 섬김의 외적 행위를 구분하지만, 칼뱅은 이런 구분을 따르지 않는다. 그에게 선행은 그리스도에게 참여하기 위한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칼뱅은 선행을 구원의 계획 속에 위치시키면서도 은혜의 우선성과 비상응성을 훼손시키지 않고자 했고, 디도서 2:11-14 과 엡 2:8-10에 근거해서 선행이 은혜의 목적이라는 신학을 전개했다. 이런 신학은 칼뱅이 이신칭의가 도덕적 부분을 등한시하고 율법폐기론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가톨릭의 비판을 효과적으로 논파하고 선행과 구원의 밀접한 관계를 다루는 성서본문들을 다룰 수 있게 허락했다. 하지만 동시에 칼뱅은 “공로신학”의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했다. 그는 믿는 자의 행위가 아무리 선하다 해도 그 행위는 죄의 오염으로 얼룩져 있다는 하나님 의의 완전성과 인간 의의 불완전함의 대비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행해지는 일의 가치가 모두 하나님께 귀속된다 해도 믿는 자의 행위가 하나님의 행위 안으로 완전히 흡수(monenergism)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한데, 그럴 경우 신자들이 수동적 존재로 축소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인협력설(synenergism)을 지지한 것은 아니고, 믿는 자의 행위의 가치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인 동시에 전적으로 믿는 자들의 행위(energism) 라고 생각했다.
칼뱅은 주님이 그분의 종들에게 답례로서 정직하고 거룩한 삶을 요구하시며, 이런 답례의 형식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에 겸손히 감사를 표하는 피조물의 목적,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이 성취된다고 주장했다. 은혜가 지니는 초충만성과 비상응성에 관한 칼뱅의 신학은 일방적인 수여를 이상화하기 보다는 사회적 의무의 연대 속에서 인간의 선물들의 순환성을 강조한다.
«바울과 선물» - <1부 제3장 바울의 은혜 해석: 극대화 패턴의 변천> (7)
5.2.루돌프 불트만
불트만은 바르트가 그리스도-사건을 인간적 규범 및 성취와의 종말론적 대립으로 강조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바르트의 “불가능한 가능성”의 “과도한” 역설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한다. 만약 계시가 순전한 기적으로 인간 의식 너머에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인간과 관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헤르만이 급진화시킨 루터의 유산에 의존해서 불트만은 바울이 인간의 상태를 다루고 믿음을 도출하려고 애쓰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바울의 “신학”은 동시에 “인간학”이라고 이해한다. 개별 신자에 대한 루터의 관심과 실존주의 개념을 융합시킨 불트만은 구원에 대한 믿음의 이해와 전유가 실상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임을 밝히고자 했다. ⟪신약성서 신학⟫에서 불트만은 바울의 인간학적 용어를 인간 실존의 존재론적 구조와 존재적 상태를 드러내는데 사용한다. 바울의 관점에서 존재적으로 인간 자아는 스스로에게서 소외되면서 자신의 진정한 삶을 빼앗긴 상태이며,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 의지함으로서만 그 자신에게로 돌아 올 수 있다.
불트만에게 죄는 신적 명령의 거역이나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자신을 토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루터의 자기 신뢰와 유사) 생각이다. 인간적 “자랑”으로 바울이 표현한 이방인의 지혜와 유대인의 율법은 바로 이러한 자기 신뢰적 태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루터와 달리 불트만은 유대교에 대한 바울의 이런 비판이 바울의 관점이지 유대교 자신의 관점이 아님을 알고 있다.)
불트만이 해석하는 바울에게 은혜는 행위, 사건, 특히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종말론적 사건인데, 은혜는 복음의 선포에 현존하면서 듣는 자와 만나고 말을 걸고 그를 후려쳐서 자신의 현 상태를 깨닫게 하고 자신에 대한 오래된 오해를 포기하게 만들며 오직 하나님에게만 의존하게 한다. 이는 믿음이 어떤 특질이 아니라 관계라고 말했던 루터의 주장과 공명한다. 불트만에게도 믿음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에 전혀 새로운 국면을 가져오는 사건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과 죽음과 생명을 신자들이 나눈다는 진술에 대해 불트만은 신자들이 어떤 초자연적 실체를 그리스도와 공유한다는 것을 거부한다. 그에게는 은혜 또한 어떤 특질이 아니며 가능성의 조건들의 변화에 국한된다.
루터와 바르트의 영향을 받아 불트만은 은혜의 비상응성을 바울 신학의 핵심으로 삼고, 은혜의 우선성을 강조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 이해와는 거리를 둔다. 불트만은 (케제만과 다르게)어떤 초월적 실체를 나타낼 수도 있는 “능력”과 관련된 바울의 언어를 주의해서 다루면서 유효성 극대화를 주저한다. 은혜가 신적 심판과 분노의 개념과는 양립불가능하다는 면에서의 단일성에는 반대하며, 은혜에 대한 요구, 믿음의 순종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불트만의 은혜는 비순환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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