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우리들의 신학

바울과 선물 - 바울의 은혜 해석: 극대화 패턴의 변천 (2)~(4) 본문

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바울과 선물 - 바울의 은혜 해석: 극대화 패턴의 변천 (2)~(4)

BundleE 2020. 3. 2. 15:38

«바울과 선물» - <1부 제3장 바울의 은혜 해석: 극대화 패턴의 변천>(2)

 

2.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를 거의 은혜라는 주제로만 읽었다(로마서가 은혜라는 주제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K.스텐달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 신학은 은혜가 “자격 없는 자에게 비상응적으로 베풀어진다”는 은혜의 비상응성을 근간으로 역사적, 논쟁적 정황 가운데 발전해갔다. 로마서에 관한 초기 저작부터 심플리키아누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발견되는 개념과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그리고 이후의 논쟁들을 통한 발전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한 학자 내에서도 발견되는 은혜 개념의 유동성이다(159-160).

 

2.1. 로마서에 관한 초기 저작

394~395년에 기록된『로마서 서언 해설』과『로마서 명제 해설』은 마니교의 바울주의를 버리고 새롭게 바울을 해석하려 했던 첫 시도들이다(161).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이 율법 행위에 반대한 것은 유대교 율법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고 읽는다. 율법과 율법의 행위를 통한 구원은 신자들의 교만과 연결되고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교만은 인간이 범하는 죄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은혜가 모든 공로보다 앞서며(우선성) 은혜가 도덕적 미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미덕을 가능케한다(유효성)는 신학을 전개한다(162).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도덕적 미덕) 하나님께서 직접 계명을 주셔야 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모든 원천이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수여된다(162).

그러나 믿음에 대해서는 『로마서 명제 해설』에서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마니교의 결정론을 반박하기 위해 자유의지의 여지를 남겨놓기 위한 해석이지만 로마서 9장과는 충돌하는 것이다(163).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야곱이 믿게 될 것(자유의지로 믿음을 선택할 것)을 미리 아시는 예지에 근거한 것이라 주장한다(163). 그러나 이는 은혜의 논리적 우선성이 아니라 시간적 우선성(믿기 전에 선택하심)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은혜의 비상응성을 일정 정도 훼손하는 주장이다. 따라서 은혜의 비상응성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주장을 포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의 비상응성과 은혜가 가져오는 적합성(은혜의 유효성)이라는 강조를 모두 유지하면서 공로 혹은 보상이 믿는 자의 삶이 만들어내는 산물임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데, 믿는 자들에게 “공로”는 바로 하나님의 선물(은혜의 유효성에 의한)이기 때문이다(165). 루터에게는 불가능한 인간의 공로 언어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한 극대화들의 혼합(은혜의 비상응성과 유효성)에서는 적합한 것이 된다(165).

 

 

«바울과 선물» - <1부 제3장 바울의 은혜 해석: 극대화 패턴의 변천> (3)

 

펠라기우스 논쟁

 

아우구스티누스는 412-430년까지 카엘레스티우스, 펠라기우스, 에클라눔의 율리아누스와 논쟁을 벌이며 은혜의 비상응성만이 구원의 모든 특징이라는 자신의 확신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특정 은혜신학과 그 신학을 전개한 학자들이 놓인 사회적 정황과의 상관 관계가 분명한 형태로 존재함을 보여준다(170).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둘 다 신중한 바울 해석자로 은혜의 우선성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일치하며, 많은 동시대인들은 둘 사이의 차이가 없다고 인식했다(170). 펠라기우스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혜의 유효성)을 은혜가 주는 주요 선물로 규명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본성으로 계시를 통해 알려지고 선한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의 모범을 통해 강화된다(170). 펠라기우스는 선을 행하려는 선택이나 의지는 우리의 것(초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이라고 보았으며, 하나님이 인간의 의지 및 행동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에 반대했는데, 그럴 경우 인간 행위자의 자유가 손상되는 것 외에도 하나님이 선뿐 아니라 악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셔야 하기 때문이다(171).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이 악에 저항할 수 있는 외적 조건들을 제공하지만 그 저항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책임은 우리 자신의 몫이라고 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선을 선택하고 행할 능력이 주어졌다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맞서 우리의 영혼의 그늘이 최초의 선물, 곧 죄의 용서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이후의 삶에서 내내 반복적으로 주어지는 치유와 도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73).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바로 우리의 의지 가운데 역사하셔야 가능하다. 그는 유아세례와 매일 드리는 기도라는 기독교 관습의 두 현상이 은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믿는 자들의 병들고 불충분한 상태를 입증한다고 주장했다(174). 자신의 은혜 신학을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경건적 삶의 요소와 결합시키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의 교리를 결함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불경한 것으로 묘사하고(174),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의존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선한 행위로부터 즐거움을 찾는 교리에 교만이 내재되어 있다고 비판한다(175).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처럼) 펠라기우스의 은혜 신학도 바울에 대한 신중한 연구에서 도출되었기 때문에 연구와 고려의 가치가 있는 중요한 성경적 혹은 바울적 요점들을 포함하고 있다. 펠라기우스와 비슷한 주장이 바울연구에서 계속해서 제기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논쟁의 역사에서 일단 ‘불경한’, ‘이단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나자, 펠라기우스 신학의 가치있는 사유와 주장들은 ‘행위 구원’이라는 단 하나의 구호 속에 갇히게 되었고, 그것의 유용성은 오직 상대편의 주장을 이단으로 레이블링 하는데에만 있으니..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바울과 선물» - <1부 제3장 바울의 은혜 해석: 극대화 패턴의 변천> (4)

 

마실리아파와의 논쟁에서 발전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의 극대화:

 

마실리아파는 카시아누스와 마르세우 수도원과 결부된 일군의 펠라기우스 추종자들로 반(semi)펠라기우스파로 잘못 명명되었던 이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념 대부분을 공유하고 있었다(175).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거치면서 자신의 견해(인간의 전적 타락)를 더 포괄적인 형태로 확장하려 했고, 마실리아파는 이런 확장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여겼다.

 

요한네스 카시아누스는 은혜의 충만성을 강조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악과 맞서 싸우고 선을 택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을 폄하하고 인간의 책임성을 거의 무로 축소하는 은혜의 비상응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176). 그는 완고한 죄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지만, 믿는 자의 (도움)요청에 하나님이 반응(응답)하신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적절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176).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나 이것이 효율적 은혜의 핵심인 비상응성을 훼손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교리나 의견의 진리 검증을 위해 “펠라기우스의 오류”에 빠지는지 여부를 살펴보게 되는데(175), 이는 “은혜의 극대화를 훨씬 더 극단적 형태로 발전시키는 양극화 경향을 예시한다(176)”.

 

 

 

여기 우리들의 신학 팟캐스트

팟빵 : podbbang.com/ch/1769565

네이버 오디오클립 : audioclip.naver.com/channels/2453

팟티 : podty.me/cast/194201

iTunes : bit.ly/theoyws

 

'구독'과 '좋아요'와 '댓글'은 언제나 환영해요.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