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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들의 신학
까슬한 것의 정체
"사회의 변화에 따라 관용의 의무가 후퇴하거나 포기될 수 있는 이유는, 관용이 힘의 불균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를 관용한다는 것 자체가 권력의 행사이고, 관용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다.[마이클 왈저(2004), 『관용에 대하여』, 송재우 옮김, 미토, 99쪽] 따라서 “관용은 ‘포용’이라는 가면을 쓴 권력 행위이다”. [웬디 브라운(2010), 『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이승철 옮김, 갈무리, 59쪽] 관용은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다. 하버마스는 관용에 내재하는 권력의 불평등을 ‘가부장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관행에서 벗어나 소수파의 행동에 대해 지배자나 다수파의 문화가 자기들 마음대로 기꺼이 ‘관용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행위”를 ‘가부장적인 것..
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2023. 8. 10. 1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