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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들의 신학
젖어미와 젖무덤 본문
젖어미와 젖무덤
<젖어미>
「젖어미」의 주인공 자쇼다는 “직업상 어머니, 어머니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브라만인 남편이 사고를 당해 생계를 책임지게 된 자쇼다는 남편을 후원하던 재력가 집안에서 젖어미 제안을 받게 된다. 자신의 젖으로 남편을 공양하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음을 알게된 자쇼다는 젖을 팔기 위해 계속해서 임신했다. 이렇게 자신의 젖으로 가정을 부양했다. 다산하고 가족까지 먹여살리는 그녀를 동네 사람들은 여신과 같은 존재로 추켜 세웠으며 그녀도 자신의 능력과 헌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20명의 아이를 낳아 몇 아이들은 죽었지만 50세가 넘어까지 그녀의 젖은 돌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아이들과 주인집 30명 아이들에게 젖을 먹였다. 그녀의 젖이 이렇게 착즙되는 동안 주인집 며느님들은 아이를 낳고도 아름다움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자쇼다의 유방은 바짝 말라 더 이상 젖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자쇼다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 예상치 못했지만, 주인집에서는 그녀가 필요 없었고, 그녀의 부재 중에 성장한 아이들도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남편 마저 그녀를 외면했다. 그녀의 젖으로 큰 주인집 아이들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오십 중반에 들어선 그녀는 주인집의 부엌 구석에서 자신의 유방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된다.
“어머니! 유모가 아픈가봐요?”
맏며느리가 물어보러 갔다. 자쇼다는 부엌에서 밥을 먹기 시작하다가 펼쳐진 사리의 가장자리에 밥을 내려놓았다. 맏며느리는 자쇼다의 바싹 마른 몸을 보고서 “브라만 자매여! 당신의 왼쪽 젖꼭지 끝이 왜 그렇게 빨개요? 맙소사! 불이 붙은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누가 알겠어요? 안에서 돌덩이가 치미는 것 같아요. 아주 딱딱한 돌 같은 거요.”
“그게 뭘까요?”
“누군들 알겠어요? 아마 엄청 많은 아이들에게 젖을 물린 탓이겠지요?”
“말도 안 되요! 젖이 나오는데 젖꼭지가 돌처럼 딱딱해질 리가 있나요. 당신 막내가 열살이잖아요.”
“걔는 낳다 죽었어요. 걔 앞의 얘는 살아 있고요. 다 그런 거잖아요. 참 죄 많은 세상이에요!”
(472-473)
이 대화 후 시간이 또 흐른 뒤에야 자쇼다는 암이 온 몸에 퍼진 채로 병원으로 옮겨지고 거기서 넘치게 젖이 흐르던 자신의 풍만한 유방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의아해하며 외롭게 생을 마감한다.
「젖어미」, 마하스웨타 데비 지음, 가야트리 스피박 번역, 『다른 세상에서』, 가야트리 스피박 지음, 태혜숙 옮김, 여이연, 2008(개정판)
인도의 독립과 민족의 발전이라는 기대로 흥분되어 있던 시기, "새 국가를 보호하겠다고 맹세한 사람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쇼다를 남용하고 착취한다. 자쇼다를 살리기 위해 할 일이라곤 없고 그녀에게 되돌려 줄 것도 하나 없고 또 과학의 도움도 너무 늦게 온다면 그녀는 암으로 죽고 말 것이다”(492) 대충의 이야기는 이렇지만 사실 이 글에 켜켜이 새겨져 있는 의미를 나는 다 이해하지 못했다.
<젖무덤>
이 책의 제목을 들었을 때 나는 “젖무덤”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이 얼마 전 약간의 소란을 일으켰던 것으로 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젖어미’를 구글링 해보니 어느 중국 시인이 자신의 젖어미를 잔뜩 추켜세운 글이 뜬다. 남성들은 ‘어머니의 젖무덤’ 혹은 ‘아내/여성의 풍만한 유방’과 같은 표현이 시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향수와 따뜻함, 안전, 모성 등등을 포기할 수 없나 보다. 혹은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나는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나도 우리 엄마의 ‘젖무덤’에서 무한한 의미를 발견하는지, 누가 나의 ‘유방’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무수한 단상들이 떠오르지만 거두 절미하고.
문제는 “내”가 나의 어머니, 나의 아내의 신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지라도 그 발화/상징은 결국 모든 여성의 신체를 일종의 피사체로 만드는 가부장적 매커니즘 안에서 작동하고 그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발화/상징이라는 것이다. 감상적인 것 다 떼어내고 나면 타자화되고 신화적으로 포장된 여성 특유의 몸뚱아리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의 신체를 상품화하는 시스템의 다른 쪽 얼굴일 뿐이다.
스피박은 이렇게 말한다. “인도라는 이데올로기적 구축물은 힌두인 대다수가 갖는, 여신으로 가득한 역전된 성차별주의로 너무 깊이 물들어 있다…여신-어머니(이 어머니가 노예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위장하는)라는 인도에 대한 헤게모니적 문화적 재현이 존재하는 한, 자쇼다는 그러한 자기재현이 허용하는 거대한 기대에 짓눌려 무너질 것이다”(492)
시인의 말은 아름답다. 장식이 달린 말은 현실을 위장하고 은폐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시인의 도리가 아니다. 시인의 정신은 굴절된 세계를 더 예민하게 감각하고, 시인의 언어는 감춰진 고통을 더 예리하게 드러내어 무딘 사람들도 그것을 볼 수 있게, 분노할 수 있게, 바꿀 수 있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시인의 말은 너무도 많은 가능성을 가진 언어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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