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역사적 예수
- 한스 큉
- 복음주의
- 바울과선물
- 기독교페미니즘
- 피오렌자
- 여우신
- 여기우리들의신학
-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 여기 우리들의 신학
- 누가복음
- 신학
- in memory of her
- 크로산
- 여성주의성서해석
- 바울과 선물
- 트랜스젠더와 기독교 신앙
- 성서해석
- 바울
- 청어람
- 김선용
- 예수
- 러셀 서양철학사
- 조선희 작가
- 바파유
- 양혜원
- 게르트 타이센
- 돌이 아니라 빵을
- 이반일리치
-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
- Today
- Total
여기 우리들의 신학
숭고한 번역의 노동 본문
얼마전 읽은 글에서 한국의 신학자들이 외국 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하고 번역하는 일(그분은 그걸 수입이라고 표현했다)만을 할 뿐이며 새로운 학술 성과를 내지는 못한다고 한 비판이 계속 맴돈다.
모든 학자는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을 것이다. 신학생 나부랭이인 나는 대단치 않은 과제 제출용 소논문을 쓰면서도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 몸부림친다. 대부분 아주 극소량의 "내 의견"을 이런 저런 학자들의 치밀한 연구와 논증 위에 살짝 얹는 형식을 취하는데 그러고나면 나름의 만족감 더하기 민망함이 교차한다. 극소량의 '나의' 의견이 얼마나 어설픈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자기 이론", "고유한 학술 성과"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많은 자본과 시간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나는 규모가 상당한 종합대학의 대학원에 다니고 있지만 이 대학이 구독하는 신학관련 저널은 얼마되지 않는다. 이는 한국의 모든 신학교의 현실이며 내가 다니는 대학은 그래도 나은 축에 낀다. 학기 초 저널 구독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는데, 그것은 역시 비용의 문제다. 단행본은 신청하면 구매를 해주지만, 내가 그 책을 알고 있는 경우에만 가능한 이야기다. 이래 저래 나는 세계 신학계의 동향을 파악하기도 따라가기도 무척 불리한 상황에 놓인다. 나같은 신학생 나부랭이야 사실 도서관에 있는 고전들도 따라가기 벅차지만 국내에서 학술 연구를 이어가고자 하는 연구자들은 고충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 도생해야 하므로 생계를 위해 온갖 잡다한 일들을 뿌리칠 수 없고 자기의 돈을 들여 도서를 구입해야 하고 이런 저런 통로를 통해 국내에 없는 자료를 구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외국에서의 유학과 그곳에서의 학술 활동이 국내의 그것보다 더 뛰어난 성과를 생산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왜 한국에서는 NPP같은 학술적 성과가 나오지 않는가? 학자들이 다 게으르고 안이해서? 대학에서 종신직을 받고 안주해버려서? 대학에서 그나마 자리를 자은 이들은 제도권 밖에 있는 이들 보다는 사정이 낫겠지만, 대학도 학자들에게 연구할 시간과 자원을 충분히 지원하지 않는 현실은 짚어야 할 것 같다. 우리 교수님만 해도 한학기면 대학원 수업 2개에 학부 수업 1개 총 2.5*3 7.5-8시간 정도를 강의하시는데, 그건 적은 축에 속한다. 젊은 교수들은 80-100명이 듣는 대형강의 몇 개를 진행해야 하고 수업준비와 강의, 중간 기말 성적과 과제 평가까지 자기 공부를 위한 에너지는 남지 않는다.
사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나는 번역이 자기 책 쓰기보다 더 의미있는 일일 경우도 많다고 생각한다. 수없이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책들 중 절반이 넘는 것들은 '이런 걸 책으로 내는 것은 정말 환경에 죄다....'싶은 것들이다. 그런 책을 내느니 신학 연구에 필수적인 학술 서적들을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숭고한 작업이다. 언어의 장벽으로 고이다 못해 썩어가는 다 말라가는 우물밖에는 대안이 없는 열정 가득한 신학생들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허접한 저자가 되는 대신 훌륭한 번역자가 되는 것은 후학들을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숭고한 일이 아닌가?! 경제학자 홍기빈이 말한 것처럼 "번역은 학자의 의무다". 그는 오전에 일정 시간은 반드시 번역에 할애한다고 했다. 학자가 아니면 번역해 낼 수 없는 책들이 학자의 손을 거쳐 번역될 때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 합당한 노동의 대가와 존경과 감사가 돌아가기를 한국 신학이 좀 진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여기 우리들의 신학 팟캐스트
네이버 오디오클립 : audioclip.naver.com/channels/2453
팟티 : podty.me/cast/194201
iTunes : bit.ly/theoyws
'구독'과 '좋아요'와 '댓글'은 언제나 환영해요.
'글 > 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를 향한 언니의 믿음·희망·꿈, 아직 안녕한가요? (0) | 2021.01.27 |
---|---|
수치의 고통 vs 연민의 안락함 (0) | 2021.01.27 |
꼴사나운 용어 (0) | 2021.01.19 |
페미니스트 성서해석의 임무와 가능성에 대한 고민 (0) | 2021.01.19 |
신약 전승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 (0) | 2021.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