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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복음주의, 기분 나쁘셨나요 본문
요즘 ‘아저씨’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연배, 옷차림, 말투, 행동, 사고방식 등과 관련해 어떤 교집합을 형성하는 지점을 ‘아저씨’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인지, 그런 아저씨라는 용어(?)는 대체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건지 등등…
생각해 보니 내가 모든 중년 남성을 보고 ‘아저씨’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부터 듣고 있는 ‘국어 문장’ 수업의 선생님은 80년대 학번이시고 외모는 천상 ‘아저씨’다. 하지만 생각과 말은 전혀 아저씨가 아니다. 그래서 난 선생님을 보며 ‘아저씨’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는다. 그를 보며 나는 어떻게 저분은 저렇게 괜찮게 나이를 드실까 생각한다. 짧은 시간 안에 나를 이렇게 설득시킨 그의 특징은 ‘말투’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확정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어느 질문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공감하고 열린 대답을 내놓지만 정보는 확실하게 전달하신다. 작은 교실에서 몇 명 안되는 수강생과 줌수업을 더듬더듬 병행하며 때때로 컴퓨터 화면에 대고 큰 소리로 “줌 수강생들! 질문 없어요?! 잘 보이나요?!” 라고 외칠 땐 너무 웃기다. 전혀 멋부리지 않고 아는 척하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서 내가 전달받는 이런 순전한 기쁨이라니. 선생님과의 마지막 수업이 슬프기까지 하다.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아저씨라는 말이 긍정적 함의를 가지는 것 같지는 않다. 왜지? 일자리가 불안정해지고 경쟁이 극심해지며 양극화역시 심화되면서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된 아저씨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젊은 세대의 기득권 중년에 대한 적대감은 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런 건 누가 연구 안하나? 아님 이미 했는데 나만 모르나?
아저씨가 어떤 고정되고 확립된 실체는 아니다. ‘아저씨 복음주의’라는 표현이 어떤 공유된 의미를 가지는 것 같긴 한데, 우선 나는 그야말로 눈을 들어 사회참여적 복음주의를 보니 다 아저씨더라…는 뜻으로, 그 다음엔 87년의 청년들이 이제 사회의 지도자적 위치를 차지한 기득권 세력이 되었고 그들이 비판했던 87년의 기득권과 비슷한 행태를 보인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저씨가 어떤 실체는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수행’이다. 우리가 현재 사회문화적으로 모호하게나마 공감하고 있는 ‘아저씨다움’은 어떤 존재가 그것을 수행함으로써 실체를 획득한다. 아무도 그것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아저씨는 현재의 부정적 의미를 상실하거나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아저씨가 싫으신 아저씨들은 아저씨를 행하시지 않을 수 있다. 나의 국어 선생님처럼.
“아저씨 복음주의라 불리니 기분 나쁘다”는 말을 전해듣고 아저씨 복음주의라는 말이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의 현실의 한 면을 적확하게 표현했고, 그래서 감정을 자극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아저씨 복음주의를 벗어나는 일은 생각보다 굉장히 쉽다. 아저씨가 아닌 다른 세대와 다른 성별/젠더, 그리고 여러 의미에서의 다른 존재들이 복음주의의 핵심을 함께 구성하면 된다. 그러면 아저씨 복음주의는 더 이상 아저씨 복음주의일 수가 없다. 눈을 들어 사회참여적 복음주의 단체들을 봤는데, 대표자 회의의 아저씨 비율이 30%정도라면 누가 그것을 아저씨 복음주의라 하겠는가?
우습지만, 아저씨들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떠올렸다. 아저씨 한 명, 한 명은 선량하고 좋은 사람일거다. 그러나 이들이 조직을 이루고 단체로서 행위하면서 그것이 ‘아저씨’의 위치와 이해를 대변할 때, 집단으로서의 ‘아저씨’는 비도덕적일 수 있다. ‘복음의 공공성과 사회적 정의’라는 구호 속에 오직 아저씨들의 정의만이 구현된다면 복음은 어떤 면에서도 ‘공적’이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사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복음의 공공성, 신학의 공적 역할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포괄하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각자가 각자의 이야기를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안에서 온갖 색색의 실로 자아내고 그 실들이 생동감있는 태피스트리로 짜여지는 것이다. 그렇게 짜여진 태피스트리는 세상을 향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갈 수 있다. 많은 다양한 존재가 그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우리는 ‘복음의 공공성’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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