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우리들의 신학

레기온에 사로잡힌 남자와 혈루증 앓는 여자 2 본문

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레기온에 사로잡힌 남자와 혈루증 앓는 여자 2

BundleE 2019. 12. 18. 23:29

<레기온에 사로잡힌 남자와 혈루증 앓는 여자>

 

(2)

인간으로는 살아있으나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않는 자를 가리켜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라고 부른다. 레기온에 사로잡힌 남자와 혈루증 앓는 여인을 우리는 ‘호모 사케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호모 사케르들은 자신의 위치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외부의 구원의 손길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사회적, 상징적 경계를 넘어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다. 예수는 발화되지 못하는 침묵의 아우성에 반응하시고 그들이 호모 사케르라는 위치에서 동료 시민, 이웃의 자리로 옮겨지는 일에 기쁘게 동참하신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호모 사케르의 개념으로 포섭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법적인 위치와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한 난민, 불법 이주 노동자, 동성애자, 중증 장애인, 어린이가 떠오른다. 필시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그룹들이 있을 것인데, 내가 인지하고 있는 정도가 이만큼이다. 이 말은 그들은 알아보려 애쓰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 쉽다는 뜻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호모사케르의 범위를 이렇게 확장시킨다. “오늘날의 호모사케르는 매우 선심쓰는 듯한 방식으로 보살핌을 받고 있어 자신의 온전한 인간성을 박탈당한 이들”이다. 인권은 있으나 시민권은 박탈당한 존재, 주권자가 아니라 복리, 후생의 대상으로만 간주되는 존재가 호모사케르라는 것이다. 지젝의 정의에 따르면 해당 집단에 따라, 우리는 누군가를 호모사케르의 자리로 밀어낼 수도 있고, 나 자신이 호모사케르의 위치로 밀려날 수도 있다.

 

예수의 “호모사케르 이웃만들기” 프로젝트, 우리는 어떻게 동참할 수 있을까? 우선 우리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을 호모사케르의 위치로 밀어내는 사소한 행동들을 멈출 수 있다. 우리는 차별을 당한 사람은 있으나 차별을 행한 사람은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가 차별을 행하고 있다는 것 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저자 김지혜 교수는 “비하성 유머를 할 때 우리 안의 편견이 봉인 해제되며, 차별을 더 가볍게 생각하게 되고 차별적 행동을 용인하게 되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예전에 나는 “아줌마”를 비하하는 농담들이 웃겼다. 그런데 내가 아줌마가 되니 그런 농담 하나도 웃기지 않다. 그 말이 어떤 함의들을 이고 있는지 연약한 개인에게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는지 피부로 느끼기 때문일게다. 여성들을 둘러싼 비하 용어와 외모지상적 평가를 서슴지 않는 당신이 바로 여성들을 호모사케르의 자리로 밀어내고 있는 사람이다. ‘결정 장애’, ‘병신’, ‘암 걸릴 것 같다’와 같은 말들의 경우 장애를 가진 이들과 환우들을 호모사케르로 만들고 그곳에 머물게 한다. 이런 칼이 되는 말들의 리스트는 사실 끝이 없다.

 

티끌모아 태산이다. 죄라고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티끌같은 말 한마디가 모이고 모여 사회적 약자의 머리 위를 태산처럼 덮친다. 그럼, 말을 아예 하지 말고 침묵하겠다고? “우리의 투쟁에서 정말로 아픈 것은 적들의 비난이 아니라 친구들의 침묵이다” 마틴 루터 킹의 말이다. 우리의 침묵은 사회적 강자에 대한 동의에 지나지 않는다. 대신 잘 말하자.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사회적 약자들이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말을 쓰고, 그들을 비하하는 말을 내뱉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말이 칼”이라는 것을 말해주자. 여러가지 이유로 소수적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우리 이웃의 자리에 올 수 있도록 인식의 공간과 사회적 공간을 만들어가자. 우리가 속한 어떤 집단, 특히 교회공동체에서 우리가 혹시 누군가를 혹은 어떤 존재들을 정치 결정 과정에서 배제시켜 호모사케르로 만들고 있지 않은지도 살펴보자.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호모사케르가 되었을 때, 우리를 그렇게 규정하는 상징질서에 도전하는 것 또한 예수의 “호모사케르 이웃만들기 프로젝트”에 동참하는 일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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