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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들의 신학
가부장적 논리가 지배하는 집 vs 평등과 민주화의 논리가 지배하는 에클레시아 본문
"예수의 제자가 된 모든 이들이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집'을 떠날 필요는 없었지만, 억압과 착취의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집'은 떠나야 했다. 약자에 대한 강자의 지배가 당연시되는 '집'에 살면서도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엄을 누리는 '교회'의 삶을 살아야 했다"
박영호, 『우리가 몰랐던 1세기 교회 : 오늘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사회사적 성경읽기』, IVP, (2021): 79
만약, 저자가 해석하는 대로 바울이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가부장의 지배와 억압, 폭력과 착취의 공간인 집'과 '평등과 자유와 연대의 공간으로서의 에클레시아'를 구분하고 있다면 바울 보다 더 페미니즘적이기는 어렵다.
가부장적 논리가 지배하는 집 vs. 평등과 민주화의 논리가 지배하는 에클레시아
기원전 594년 솔론은 귀족의 권한을 축소하고 시민의 권한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아테네 민회(에클레시아)를 소집해서 국가 중대사를 결정했다. 바울은 아마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카할(קהל)을 에클레시아로 번역한 칠십인경의 영향을 받았을테고, 아테네 민회를 염두에 둔 채 이 단어(에클레시아)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집과 에클레시아를 위와 같이 반정립할 경우, 바울의 에클레시아는 솔론의 한계를 넘어서는 혁명적 발상이다. 그가 '시민'의 자격을 '하나님의 자녀'로 확장시켜 갈라디아서 3.28에 호명되는 모든 존재들을 에클레시아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회'의 여러 주요 사안에 '결정'하는 자들로 참여한다. 그렇다면 현대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바울보다 더 페미니즘적이기는 어렵다. 갈라디아서 3.28에서 바울이 포착하려 했던 1차적 존재와 2차적 존재들. 그들이 동등하게 인간이자 시민으로 재현되고 대표되는 세상. 이게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꿈꾸는 세상인데. 그리고 물론 우리는 바울보다 더 바울적일 수 있고.
왜 여기저기서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콕집어 성서를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보면 안된다고 훈계하는걸까? 뭐가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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