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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들의 신학
누가는 왜 그랬을까? 본문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라는 더글라스의 명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이 명제는 모든 사람과 사물이 우주적 질서 안에 고유한 자리를 가지고 있음을 함축하는 것 같다. 또한 그 자리들이 높고 낮음이 있을지언정, 우주적 질서를 지탱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중요하다고 가정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더글라스의 명제는 자리들, 혹은 그 자리에 배정된 사람들이나 사물들의 상대성과 상호의존성을 가정한다. 하지만 이런 가정이야말로 차별을 은폐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이다. 실제로는 여성의 사회적 성원권을 부정하면서도 음양론에 의거하여 여성과 남성에게 대칭적이고 상호보완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좋은 예다. 그러면서 여성이 집 밖을 마음대로 나다니는 것을 금기시한다. 하지만 여성의 자리가 집 안이라는 말이 곧 집이 여성에게 속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은 공적으로 성원권이 없기 때문에 사적인 공간을 가질 수도 없다. 다만 남성의 사적 공간인 집에 그의 소유물의 일부로서 속해 있을 뿐이다...'혼자 사는 여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은 안/밖의 구별이 결코 대칭적이지 않으며, '집 안에 있다'는 것은 곧 '남자의 지배 아래 있다'는 뜻임을 분명하게 알려준다...가부장주의란 남자만이 집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또한 주인=남자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룬다는 생각이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 지성사, 2015, 75쪽.
가부장적 세계 안에서 남자에게 배타적으로 배정된 장소에 접근을 요구하는 여성이나 그 장소를 이미 점유한 여성은 '제자리에 있지 않고' 그래서 '더럽다' 혹은 그곳을 '더럽힌다'. 아마도 이런 세계관이 여성을 바라보는 성서적 세계관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류가 균질하게 어떤 제시된 세계관이 동조하는 것은 아님을 주목할 필요도 있다.
로마 당국은 동양의 이교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그 주요한 이유로 여성 리더십의 활약이 꼽혔다고 한다. 그들이 보기에 그것은 로마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행위다. 그리스 디오니소스교, 이집트의 이시스교, 유대교, 초기 기독교는 이러한 이유로 로마의 박해의 대상이었다. 폭력과 박해를 지켜 본 후대 기독교인들은 자신을 교정해서 로마의 문화에 적응시킴으로써 이 위험을 피하고 자신들이 로마의 문화와 질서에 합당한 자들임을 증명하려고 했을 수 있다. 몇몇 학자들은 누가-행전과 에베소서, 목회서신에서 두드러지는 여성리더십의 후퇴가 이러한 사회-정치적 맥락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이러한 문화적 동화(acculturation)은 기독교만의 것은 아니며 누가와 동시대 작가인 요세푸스(유대인)나 디오니시우스(그리스인)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경향이라고 한다.
누가복음 7장,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죄인'인 여자 본문을 이리 저리 비춰보고 있는데, 일단 이 본문이 처음 내게 주었던 인상이 너무 강해서 그것으로 자꾸 수렴이 되어버린다. 내게는 이 장면이 충격적일 정도로 '굴욕적'이다. 자신을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스스로를 포기했거나 포기당한 존재만이 감행할 수 있는 그런 행동. 결국 나의 질문은 어느 쪽에서 출발하든 누가는 왜 이렇게까지 이 여인을 굴욕적 상황에 몰아넣고 굴종하는 행위를 부여했을까에 가 닿는다.
누가를 옹호하고 이 본문을 복음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이 여인이 많은 죄를 용서받아 공동체로 회복되었다고 주장한다. 나는 글쎄...이 여자가 공동체로 회복될 수 있을까? 공동체라는 것은 어떤 공동체일까? 이스라엘이니까 제의 공동체? 아니면 나인성의 도시 공동체? 하지만 예수의 '죄를 용서하는 권위'가 도전받는 상황에서 예수의 선언 '너의 죄가 사하여졌다'라는 말이 그가 속한 공동체에 효력이 있었을까? 이 여인은 병을 가졌다가 치유된 이들과 달리 외적 증표가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누가는 여자의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는 했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여자의 삶의 회복'을 말하기에는 본문이 너무 빈약하다. 본문의 관심은 여자가 아니라 여자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부각되는 예수의 탁월함, 그런 분께 마땅히 보여야 하는 태도이다. 그것을 강조하려다 보니 정작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여자의 이상한 행동은 그냥 이상한 상태로 남는다. 그 행동에 대한 어떤 해명도 제공되지 않아서 그 여자와 그의 행동은 역사 속 수많은 남성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그들 중 몇몇은 자신을 예수와 동일시 하고 자신에게 행해지는 여자의 그런 굴종적 행위를 칭송한다. 정말 아름다운 순종이고 사랑이라고. 그래서 다시 물을 수 밖에. 누가는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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