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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겨운 해석: 누가복음의 향유 부은 여인 본문

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역겨운 해석: 누가복음의 향유 부은 여인

BundleE 2021. 9. 12. 15:35

논문의 가닥을 잡기 위해 DBpia에서 "누가복음"을 검색했다. 생각보다 상당히 많은 수의 관심을 끄는 논문들이 있다. 누가복음이 여성에 대해 우호적 시선을 가진다거나 심지어 최초의 여성해방적 문헌이라던가 하는 식의 주장이 생각보다 지배적인데, 그중 무려 50페이지에 달하는 소기천 교수의 "신약성서에 나타난 내재저자의 여성 경향성: 누가복음을 중심으로"가 단연 눈에 뜨인다.

 

내 논문의 명확한 논지를 잡기 위해, 그러니까 다소 절박한 필요로 읽기 시작한 글이 누가복음 7장 향유 부은 여인 본문에 도달했을 때, 나는 남성 신학자로서 일정한 권위와 권력과 영향력을 차지하고 있는 자의 글쓰기가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동시에 자신의 시각과 주장을 ‘여성의 것’으로 가장한 채 얼마나 역겨운 주장을 할 수 있는지 경험했다.

 

저자는 누가복음서에 여성 제자도의 다양한 모델이 제시되지만 동시에 여성 제자도가 상당히 전통적이고 수동적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여성주의 학자들의 지적은 일축하고 여성 독자로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주장을 하면서 누가복음의 내재적 저자가 여성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누가복음 1: 24에 임신한 지 5개월이 지나는 동안에 엘리사벳은 숨어서 지낸다. 이것은 누가복음의 내재저자가 내재독자에게 여성 경향성이 가지고 있는 그 특유의 감각으로 여성의 임신을 두둔하는 전형적인 표현방식이라고 평가 할 수있다. 왜 엘리사벳이 임신한 후에 5개월을 숨어서 지냈다고 누가복음의 내재저자는 표현하였을까? 나이가 들어서 임신을 한 엘리사벳이 인간적으로 가질 수 있는 일말의 부끄러운 처지를 공감한 내재저자가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자신이 여성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내재독자에게 표현한 것은 아닐까? 여성 경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과연 이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내재독자의 입장에서 이렇게 엘리사벳을 두둔하는 표현은 보호받고 사랑받고 싶은 여성의 심리적 경향성을 잘 나타내준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925-926)

 

히브리 성서에서(그리고 아마도 유대 문화에서) 나이든 여성들의 기적적인 임신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와 함께 한다는 명예로운 일이다. 엘리사벳의 임신은 하나님이 엘리사벳의 수치를 거두어가고 명예를 부여하는 사건이다. 저자는 1세기 헬라화된 팔레스타인의 맥락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나이든 여자의 임신은 부끄러운 처지라고 말한다. 그 시각은 남성인 저자가 나이든 여자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것이지 누가복음서 저자의 것이 아니다. 5개월의 숨은 기간에 대해 심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의학적인 고려라든가 시간을 중시하는 누가가 마리아의 임신 시점을 특정하기 위해 설정한 문학적 장치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보호받고 사랑받고 싶은 여성의 심리적 경향성” 역시 남성 저자가 여성을 바라보는 권위적 재현 방식이지 실제 여성들이 어떠한가와는 상관이 없다. 저자는 “누가복음의 내재저자가 그 특유한 여성 경향적 감각”이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는데 그가 말하는 여성경향적 감각이라는 말은 거의 저자가 정의하는 “여성다운 심리나 행동”과 관련된다.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사건이 복음서에 모두 나오지만, 누가복음 7:38은 특별히 그 여인이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었으며 그의 머리털로 발을 닦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묘사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진술인데, 여기서 누가복음의 내재저자가 내재독자와 감각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 여성 경향적인 필치로 사건의 깊이를 세밀하게 이끌고 나간다. 예수에게 향유를 붓기 전에 다른 어떤 것이아니라 자신의 머리털로 먼저 닦았다는 사실은 여성들이 지닌 사랑을 가장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자신의 신체의 일부분으로 예수를 닦았다는 사실을 표현함으로써 누가복음의 내재저자는 자신의 여성 경향성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여성 경향적 필치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점을 중시하면, 우리는 누가복음의 내재저자가 자신의 여성 경향성을 은연중에 내재독자에게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928-929)

 

저자의 해석은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을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는 죄인”으로 각색한 누가의 의도가 “여성적”이라고 주장한다. “감각적 공감대 형성”이라거나 “자신의 신체 일부분으로 예수를 닦았다는 사실이 누가복음 내재저자의 여성 경향성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다”고 말하는 저자의 여성제자, 여성 그리스도인에 대한 ‘상’은 무엇인가? (사실 알고 싶지 않다. 알게 될까 무섭다.) 이러한 그림은 누가복음의 예수의 권위가 명시적으로 초대 교회의 사도들에게 위임된다는 사실, 그 사도들의 권위가 중세 가톨릭 교회의 남성 사제직에게로,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교회의 남성 신학자와 목회자에게로 계승된다는 것을 고려할 때 더더욱 문제적이다. 이 본문을 ‘남성중심적’이 아니라 ‘여성(중심)적’이라고 읽는 것은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가? 저자가 그리는 이상적인 여성, 그들의 심리, 그리고 남성선교자들을 기쁜 마음과 풍성한 재물로 섬기는 아름다운 여성 제자들의 모습은 분명 남성 저자의 관념 속에서 구성된 허구에 불과한데도 저자는 자신의 관념에 ‘내재적 여성 저자’라는 외피를 입혀 이것이 마치 실제 여성의 재현인 것처럼 주장한다.

 

누가복음의 저자가 여성이라거나 여성 우호적이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인 것 같다. 이것은 누가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쓰고 있는 전략과 관련이 있어보인다. 누가는 예수의 입을 통해 종교장 안의 여성들을 설득한다. 그들에게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말하는 대신 예수와 동등한 위치에서 의견을 제시하려 하는 마리아를 침묵시키고 침묵하고 순종하는 마리아를 칭찬하는 방식으로, 여성제자들에게 목소리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재물로 섬기는 역할을 배당하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목회서신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전략을 구사해 여성리더십을 억합하는 것이다. 가부장적 사회와 종교에 대한 페미니즘의 강력한 문제제기 이후, 목회서신과 같은 방식은 이제 효과가 덜하다. 여성제자도를 남성에게 종속시키고 가부장적, 남성중심적 권력 구조의 신학과 교회의 건재를 원하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누가복음에서 양질의 자원을 발견한다.

 

2004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쓰였다는 이 논문이 사회나 교회의 여성의 상황과 위치, 역할의 ‘진흥’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따져보고 싶다.

 

소기천 (2006). 신약성서에 나타난 내재저자의 여성 경향성. 신약논단, 13(4), 897-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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