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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마르다와 마리아는 같은 자매일까? 본문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마르다와 마리아는 같은 자매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모두 자매가 베다니에 살았다고 한다. 물론 요한복음은 그 자매에게 죽었다 소생한 나사로라는 남자형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그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꼼꼼히 본문을 읽다보면 나사로는 그냥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비적 사건으로 고안된 인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요한복음에서도 그 비중이 크지 않다. 11장과 12장에 걸친 이 남매들의 이야기에서 나사로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께 전하는 전갈에 등장하거나 무덤에서 천에 둘둘 말려서 나오는 기괴한 장면에 등장하거나, 마르다가 베푼 잔치에서 예수와 무리들 사이에 '끼어'앉아 있는 것으로 등장할 뿐 말 한마디 없다. 그에 비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와 긴 대화를 나누고 신학적 고백을 하며 예수의 마음을 흔들고 그의 죽음을 준비하는 향유를 붓는 행위를 한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다른 점이 있다면 누가복음을 읽고 나면 마르다가 비호감이 되고 여자라면 모름지기 마리아 같아야지 하는 생각이 스며든다는 것, 마르다와 마리아를 이분법적으로 이해해서 둘 중에 누구 편을 들어야 할 것같은 생각이 든다는 것, 여자들의 역할은 마르다와 같이 일을 열심히 하든 아니면 마리아 같이 조용히 남자의 발치에 앉아 경청하든 두 가지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
어제 <여성주의성서해석> 모임에서 한 분이 자신은 목사님이 (농담처럼!!) 여자들은 집에서는 마르다처럼 열심히 일하고 교회에서는 마리아처럼 열심히 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다른 분은 젊은 시절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교회에서도 여러 문제제기를 했는데, 동기가 자신을 따로 불러내더니 마르다처럼 말고 마리아처럼 살아야 한다고 충고를 했다고 한다(그 동기가 목사가 되었다고..). 성서해석의 지고한 역사에서 반복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세상에서도 남자들은 여자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틀에 집어넣을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의 오만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서를 오독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두 자매를 꽤나 다르게 묘사한다. 적어도 두 사람의 관계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요한복음에서 마리아와 마르다는 서로 경쟁하거나 대립하는 사이가 전혀 아니다. 요한복음에서도 마르다는 손님대접으로 분주하다. 요한복음에서도 마리아는 예수의 발치에 앉아 그의 발에 향유를 붓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마르다는 그런 마리아에게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 각자의 성향대로 각자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서로를 인정하고 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마르다와 마리아는 비슷한 성향으로 그려진다. 마르다는 적극적으로 대화를 주도하고 활동적이며 집에 일이 있을 때 시원시원하게 큰 일들을 해내는 능력자다. 마리아는 말수가 적다. 그녀는 말하기 보다는 듣기를 즐겨하고 예수와 감정적 교감이 컸던 것 같다. 예수가 마리아가 울 때 마음이 요동쳐 눈물을 보이셨던 것처럼 마리아는 예수가 직면한 수난의 고통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그의 죽음을 향유를 부어 예비한다. 자매라도 매우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성향이 매우 다른 두 여성의 공동 사역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꽤나 성공적이었고 큰 명성을 얻었던 것 같다. 누가복음이든 요한복음이든 마르다와 마리아는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처럼 소개되니 말이다.
누가복음과 다른 복음서가 함께 다루는 사건이나 인물의 경우 우리는 보통 누가복음의 것을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그만큼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누가복음은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그래서 때로는 편향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여성 등장인물들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복음서들, 특히 요한복음서를 함께!! 읽는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모든 성차별, 인종차별 그리고 각종 혐오는 '농담'안에 박혀 있다. 어느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자신을 성차별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드러내어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각종 혐오의 발언은 '농담'의 외피를 쓴다. 그래야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언제든 철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농담'하지 말라고 해야 한다. '농담도 못하냐?' 하지 마라. 그런 말 밖에 못할 거라면 'it is much better to bite your tong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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