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양혜원
- 트랜스젠더와 기독교 신앙
- 여기우리들의신학
- 바울과 선물
-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
- 역사적 예수
- 게르트 타이센
- 기독교페미니즘
- 이반일리치
- 여우신
- 여성주의성서해석
- 복음주의
- 크로산
- 바파유
- 러셀 서양철학사
- 예수
- 돌이 아니라 빵을
- 청어람
- in memory of her
- 성서해석
- 조선희 작가
- 바울과선물
-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 누가복음
- 김선용
- 피오렌자
- 신학
- 바울
- 한스 큉
- 여기 우리들의 신학
- Today
- Total
여기 우리들의 신학
디모데전서의 상황을 재구성하기 본문
어제 <청어람 여성주의 성서해석>에서 디모데전서를 함께 읽었다. 여자들에게 초점을 맞춘 텍스트로 보자면 아주 귀한 디모데전서는 당시 초대교회 공동체에 여자들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드러내준다. 서신서 저자는 여자들이 예언하고, 가르치고, 지도권을 행사하는 등 ‘남자들 위에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하고 이것을 ‘진압‘하려 하지만, 여자들의 권위 행사를 막으려는 그/그녀의 열렬하면서도 선넘은 시도(“여자는 해산으로 구원을 얻는다”와 같은)는 오히려 이 공동체 여자들의 사역이 얼마나 활발했는지 증거한다. 서신서 저자의 편에서 일종의 ‘질서 잡기’의 시도에 가장 격렬히 저항했던 혹은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했던 집단은 ‘과부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과부의 명부에 오를 수 있는 ‘진짜’ 과부에 대한 아주 구체적이고 엄격한 자격을 제시하는데 어제 한 참여자분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당시 60세까지 사는 것은 기대수명을 한참이나 넘긴 것이며 만약 이 이하의 여자들을 ‘젊은 과부’라고 하면 저자가 자신의 아젠다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는 이 과부 집단을 해체하고 어떤 기능도 할 수 없게 축소하려 시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신서 저자가 보기에는 이것이 ‘질서’를 잡는 유일한 방도이다.
셸던 월린의 글을 읽다가 다시 이 장면이 떠올랐고 정치에 관한 이 구절에 비추어 디모데전서의 상황을 재구성하면 현재 우리의 교회에도 교훈이 될만한 의미가 추출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라톤이 주장한 것과는 현저히 다른 질서의 관념이 조정의 정치에 함축되어 있다. 만약 조정이 통치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과업이라면 - 그리고 ‘정치’의 본성은 이를 긍정하는 듯 하다 - 질서란 고정된 본이 아니라 불안정한 평형과 유사한 것이며, 부분적인 해결책을 기꺼이 수용할 것을 요구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플라톤에 있어 질서란 신성한 모델을 본떠 만들어진 주형의 본성과 같은 것이며, 사회를 일정한 이미지로 각인하는 데 사용되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주로 갈등을 근절하고자, 즉 정치를 제거하고자 하는 정치학으로부터 어떤 질서가 생겨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질서가 갈등과 대립이 없는 상황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면, 그렇게 창조된 질서는 특유한 요소를 사상한 것이다. 즉 그것이 질서일지는 모르지만 ‘정치적’인 질서는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정치적’ 질서의 본질이란 더불어 사는 삶으로부터 나오는 긴요한 사항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다루기 위해 - 즉 필요한 경우에는 그들을 상쇄시키고, 가능하면 완화하고, 기회가 허용하는 한 창조적으로 재조정하고 변형하기 위해 - 고안된 안정적인 제도적 배치의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사회란 강압에 의해서 질서를 수립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런 사회는 더 이상 ‘정치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정치적’ 사회에 대한 이런 관념으로부터 정치의 기예는 질서란 주어진 사회 안에서, 곧 공동체의 다양한 세력과 집단들 사이에서,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시행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질서의 이념은 현존하는 경향들과의 가장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구성되어야 하고,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정치적인 문제들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질서의 이념을 포함한 어떤 정치적 관념도 이제껏 완전히 실현된 적이 없다는 냉정한 인식에 의해 절제되어야 한다.“
셸던 월린, <정치와 비전 1>, 강정인, 공진성, 이지윤 옮김, 후마니타스, 2103, 88-89.
서신서 저자가 주장하는 ‘창조의 질서’는 공동체 내의 다양한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근절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그 질서는 더 이상 정치적이지 않은 예수공동체의 가장 강력한 추동력이자 생명력이었던 다양성을 거세하고 한 집단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질서로 후퇴할 것을 요구한다. 2000년의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2000년 전의 서신서 저자보다 인식론적으로 우위에 있다. 그의 오류를 정확히 진단하고 평가하는 것, 이런 류의 강압적 질서 창조에 의한 퇴보를 직시하고 회복과 전진의 계기로 삼는 것...뭐 대충 이런 것이 우리의 과제가 아니겠는가.
팟빵 :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69565
네이버 오디오클립 :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453
iTunes : https://bit.ly/theoyws
'구독'과 '좋아요'는 언제나 좋아요!
#여우신 #여기우리들의신학 #신학
'글 > 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앙의 지혜로운 어른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음을 축하하며 (0) | 2023.09.03 |
---|---|
목회서신서를 페미니스트 비평적 관점으로 분석하기 (0) | 2023.09.03 |
다양한 의미를 탐색하는 것 (0) | 2023.08.21 |
경악과 기쁨을 ‘여성주의 성서해석’에서 경험한다 (0) | 2023.08.21 |
가부장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억압에 굴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성서를 읽을 수 있는가? (0) | 2023.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