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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들의 신학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본문
법률 전문가들은 희생자들의 무국적 상태가 되도록 필요한 법적 조치들을 강구했는데 이 일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나라도 그들의 운명을 문제 삼지 못하게 되고,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국가에서는 그들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었다...유대인 장로회는 아이히만과 그의 부하들을 통해 각 열차를 태우는 데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필요한지 들은 다음 수송될 사람의 명단을 만들어 주었다. 유대인은 등록을 하고 무수히 많은 서류들을 작성했으며, 재산이 보다 손쉽게 탈취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장의 재산 관련 질문지들을 작성하고 또 작성했다...아이히만이 아는 한에서는 아무도 저항하지 않았고 아무도 협력을 거절하지 않았다...아이히만이 말한 것처럼 그의 양심을 달랜 가장 강력한 요인은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 유대인 집단 학살)에 반대한 사람을 실제로 한명도, 단 한명도 볼 수가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유대인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더욱이 대부분 사무실에서 일하던 그들이 수십만 명의 타인들을 절멸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184-7쪽
"유대인 중앙위원회는 모든 유대인의 정신적, 물질적 부에 대해서 그리고 모든 유대인의 인력에 대해서 처분할 수 있는 절대적 권리를 부여받았다. 우리는 유대인 관리들이 살인의 도구가 되었을 때 (‘자신의 배가 침몰할 때 갖고 있던 화물들을 바다로 던져버리고 배를 안전하게 항구로 운항한’ 선장들처럼, ‘100명의 희생자를 내고 1000명을 구한, 1000명을 희생시키고 1만명을 구한’ 구원자들처럼) 어떤 생각이었는지 알고 있다. 진실은 끔찍했다. 헝가리에서 카스트너 박사는 대략 47만 6000명의 희생자를 내고 정확히 1684명을 구출했다. ‘맹목적인 운명’에 따라 선별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진정으로 신성한 원칙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신성한 원칙들’은 누구를 구원으로 이끌어 냈는가? ‘지브루[공동체]를 위해 생명을 바쳐 일한’ 사람들(즉 지도층 인사들) 과 ‘아주 저명한 유대인’이라고 카스트너는 자신의 보고서에서 말하고 있다.
어디에서 살든지 간에 유대인에게는 인정받는 지도자들이 있었고, 거의 예외없이 이들의 리더십은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나치스와 협력했다. 모든 진실은 만일 유대인이 정말로 조직이 되어 있지 않았고 또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혼란과 수많은 불행들이 있었겠지만 희생자들 전체가 400만, 500만, 600만에 달할리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유대인위원회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더라면 그들 가운데 절반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산)".
아렌트의 이와 같은 유대인 지도 조직에 관한 (‘폭로'가 아닌) ‘사실적시’는 아이히만 재판을 두고 이스라엘 수상 벤구리온이 그린 그림에 큰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에 의해서는 거의 민족에 대한 반역자으로 여겨졌다. 이 글이 NewYork Times에 실린 후 그는 미국 유대인 공동체의 지속적인 비난과 협박에 시달렸고, 유대인 공동체와 관련된 활동에서 배제되었으며, 가깝게 지내던 유대인 친구들도 등을 돌렸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188, 196~197쪽
아이히만은 나치 운동의 다른 요소들과 대비하여 항상 ‘좋은 사회’라는 관념에 의해 압도되었다. 그가 끝까지 열렬히 믿은 것은 성공이었고 이것이 그가 알고 있던 ‘좋은 사회’의 주된 기준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히틀러가 모든 것이 틀린 것은 아니고 이 하나만큼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노력을 통해 독일 군대의 하사에서 거의 8000만에 달하는 사람의 총통의 자리까지 도달했습니다. 그의 성공만으로도 제게는 이 사람에게 복종해야만 할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그는 자신이 그런 것처럼 그 ‘좋은 사회’가 모든 곳에서 열정과 열성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보았고 그의 양심은 사실상 휴식상태에 있었다. “양심의 소리에 자신의 귀를 가까이 할” 필요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것은 그가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양심이 “자기가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함께”, 자기 주변에 있는 사회의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더불어 말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198
"그뤼버 감독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추구한 것은 ‘고통을 줄이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미 나치스가 인정한 기존의 범주들에 따라 고통을 없애는 것이었다. 그 범주는 애초부터 독일계 유대인에 의해 저항 없이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이 범주들은 끝까지 독일인들 사이에 발생할 어떤 불편함을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오직 폴란드계 유대인만, 오직 징집을 기피한 사람만...이송된다는 등등. 자신의 눈을 감지 않으려 한 자들에게 “일반적 규칙을 보다 쉽게 유지할 수 있기 위해 어떤 예외들을 허용하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다”.
이런 특권적 범주들을 수용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보면 아주 재앙적이라 할 수 있는데 ‘예외’이기를 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일을 추구하는 가운데 이 규칙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전쟁이 끝난 후에도 카스트너는 자기가 1942년 나치스에 의해 공식적으로 도입된 범주인 ‘저명한 유대인’을 성공적으로 구출한 것에 자부심을 느꼈는데, 이는 마치 자신의 관점에서 역시 유명한 유대인이 일반적인 유대인보다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많다고 생각한 것 같다...
’특별 케이스’를 요구한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자신이 비자발적으로 공조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살인 업무에 가담한 사람들은 ‘예외로 해달라’는 요구를 받으면서 또 때때로 예외를 인정해 주고 그래서 감사를 받는 가운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합법성을 그 반대자들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고 느꼈음이 분명하다...
어린 한스 콘이 비록 천재는 아니지만 그를 전쟁이 끝날 무렵 살해한 것은 더욱 큰 죄악임을 깨닫지 못한 채, 독일이 아인슈타인을 이주시킨 것을 아직도 공공연히 후회하는 사람들이 특히 문화적 엘리트들 가운데 적지 않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6~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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