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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들의 신학
복음주의자들이 망설이는 이유 본문
"반퀴어 운동에 나서는 단체는 반동성애 집단과 탈동성애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반동성애 집단은 가장 부정적인 입장으로 ‘하느님은 동성애자를 미워한다’에 가깝고, 탈동성애 집단은 그보다는 덜 부정적인 입장인’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에 가깝다(72)...강렬한 구호를 외치는 반동성애 집단이 거리의 정치학에서 우위를 점유하고 있다면 탈동성애 집단은 주류 개신교회의 정서와 통하는 지점이 있다....원색적으로 상대를 폄하하기보다 비교적 정제된 언어로 관용을 이야기하는 탈동성애 운동은 직접적인 감정 표출을 삼가는 중산층의 성향과도 잘 맞는다.(77)
그동안 복음주의권은 ‘동성애를 긍정하지는 않지만 동성애자를 따뜻하게 맞이하는 교회’를 지향하는 수준에서 퀴어 이슈를 대했다. 복음주의권은 에큐메니컬 운동과도 함께하지 않고 반퀴어 집단과도 얼마간 거리를 둔 채 마치 관찰자처럼 퀴어 상황을 지켜봐왔다. 결국 반퀴어 운동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보수 개신교회 전반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보수 개신교회 내부에서 개혁 운동을 지향해 온 집단이 침묵하면서 자연스럽게 반퀴어 운동에 대표성과 정당성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85)
복음주의권은 반퀴어 운동에 나서는 보수 개신교회의 모습이 탐탁치 않으면서도 신학적인 차원에서 이들과 차이를 드러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퀴어 이슈에 대해서 ‘최대한 답을 미루는 전략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비공식적 자리에서는 활동가들이 서로 생각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단체 차원에서 공식적 입장을 내는 일은 쉽지 않다. 퀴어 이슈가 복음주의권 안에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86-87)
복음주의권이 머뭇거리는 또 다른 이유는 보수 개신 교회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복음주의권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선교의 의미를 풍성하게 만들었지만, 이와 동시에 사회적 책임 논의에 낯선 보수 개신교회의 현실을 고려하고 에큐메니컬과의 거리 역시 유지해야 했다. 따라서 복음주의권은 보수적인 신앙을 새롭게 구성하기보다 기존의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주제를 익숙한 방식으로 다뤄왔다. 예컨대 교회세습에 반대하는 기도회를 열 수는 있지만,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참여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결국 복음주의권은 더 나은 보수, 더 합리적인 보수, 더 성경적인 보수를 추구하면서 소수자 집단과의 연대를 교리 문제로 환원하게 된다. (87)
많은 보수 개신 교회들은 교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복음주의권을 불편해한다. 그럼에도 복음주의권은 강연, 기도회, 세미나, 시위, 예배, 토론회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교회와 사회의 문제에 개입해왔다. 퀴어 이슈에 대한 상대적인 침묵은 복음주의권이 보수 개신교회와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을 감내할 만큼 퀴어 이슈를 중요한 의제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 혹은 그런 갈등을 다룰 만한 역량이 부족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88)
하지만 복음주의자들에게 퀴어 이슈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심하게 방관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보수 개신교회가 신앙을 명분으로 내세워 사회적 소수자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퀴어 이슈는 복음주의자들에게 복음주의의 신학과 윤리, 역사와 문화에 대해 정직하면서도 심도 있는 대답을 요청하고 있다. (89-90)"
시우, ⟪퀴어 아포킬립스: 사랑과 혐오의 정치학⟫, 서울, 현실문화, 2018
*그러게…내가 어째서 계속 충돌되는 메시지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었는데...이 글이 많은 설명이 되었다. 복음주의자들은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위치에 서 있으면서도 마치 양쪽을 다 아우르는 전지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양... 말 잔치와 언어의 모호함 뒤에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지 절대로 말해주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 자신이 중립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보일 수 있다고 믿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말이 길어질 수록 말은 매끄러워지기 보다는 모순과 충돌을 드러내고 결국 그 말들이 가서 서는 곳이 어디인지는 생각보다 금방 명백해질 때가 많았다....
여성 목사 안수의 당위가 성서적으로 지지될 수 있는 만큼 성소수자의 목사 안수와 공동체에서의 풀 멤버십은 성서적으로 지지될 수 있다. 여성과 성소수자, 그리고 모든 약자들은 기독교의 주류에 의해 관용되고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배려받아야 하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그 모든 벽을 다 무수고 각기 다른 존재들 사이에 평등한 다리를 놓기 위해 ‘역사의 수레바퀴’에 자신의 몸을 던져 넣으셨는데, 누가 무슨 권리로 벽을 세우고 안과 밖을 결정하며 짐짓 호의를 베푸는 척 손을 내민다는 말인가? 루터가 말했듯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동등한 지체로 부르셨고 우리 모두 개별자로서 하나님 앞에 제사장으로 서 있다. 루터는 개신교 교회 공동체안의 다양한 존재들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탄탄한 신학적 근거를 이미 500년전에 제시한 것 같은데 왜 정작 개신교는 엄한 소리를 하며 헤매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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