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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들의 신학
배고픈 자에게 그 열매를 내어주는 무화과나무로서 존재하고 행동할 것 본문
나는 장애를 가진 사회구성원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드물다. 겨우 귀동냥이라도 하기 위해 유튜브나 포털 뉴스를 기웃거리는 정도다. 나같은 사람에게 4월 23일 무지개 신학교에서 개최한 <자퇴는 했지만 목사는 되고 싶어>에서 나누어진 한신대 신학생이었고 현재는 장애인권 활동가인 유진우님의 이야기는 깨달음의 기회였다(내 이야기가 아닌 것에 나는 뻔뻔할 정도로 무심하고 냉정할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 비/자발적으로 차별과 억압에 동참하고 용인한다). 그는 장애를 가졌지만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한신대학교에 입학했고 마지막 학기에 자퇴를 했다고 말했다. 학교도 교회도 그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열거하며 목회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 요구되는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자퇴한 지 4개월, 여전히 교단과 학교는 장애인 학생 맞춤 제도를 마련하지 않고 있다” 고 말했다.
학교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전반적 생활 시설이 장애인이 이용하기에 부적합하다. 신체적으로 어려움이 없는 이들을 기준값으로 놓고 설계된 도시의 각종 시설들은 원천적으로 그들과 다른 육체적 조건을 가진 이들을 배제한다. 높은 계단을 올라 타야 하는 버스 대신 계단없는 평평하고 낮아지는 버스가 아주 천천히 도입되고 있는데, 이 역시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의 지속적인 이동권 투쟁의 결과이다.(news.v.daum.net/v/20210424200002837?fbclid=IwAR3ZQlPe1tQ_TMZBOP5atpo7uPhmbw0jKYFIYGll8PuW07RI7kUM7846Hkw) 약 20년전 밴쿠버에서 잠깐 지낸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나는 그런 버스(저상 버스)”만” 봤다. 휠체어를 타고 버스를 이용하는 일은 거기선 흔한 일이었고 거의 모든 건물들이 장애인이 접근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가 장애인을 마주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깊이 반성해 보아야하는 이유다.
포럼의 사회를 맡은 박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상임대표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목마름이 있어요. 어디를 가서 장애인으로서 이런 것이 힘들고,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순간에 저쪽 반응은 이미 방어 자세, 그리고 안 된다는 말이예요. 된다는 말 들어봤으면 좋겠습니다. 기도가 필요하다면 된다는 말을 하는 기도를 좀 듣고 싶어요. ‘해 보자’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목마름이 있어요.”
그녀의 간절한 바램과 2천년 전 예수의 말이 내 머리 속에서 세찬 공명을 일으켰다.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막 11.24)” <복음서 연구> 중간고사의 문제 중 하나가 마가복음 11:1-13:2의 맥락에서 과부의 두 렙돈을 비평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나는 성서의 이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예수께서는 절박한 이들의 기도를 실현시켜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하나님의 중개자, 대리자인 성전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있다고 말씀하신다고 해석했다. 오늘의 한국 사회로 말하자면 교단, 교회, 신학교, 그리고 각종 종교 지도자들이다. 사회적 약자들의 기도를 현실에서 구현하라는 예수에 요구에 그들이 어리둥절해한다면 아마도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요 3.10)
- 다음은 마가복음 11:1-13:2에 대한 나의 해석이다. 나의 읽기에는 <복음서 연구> 교수님의 관점이 큰 영향을 미쳤다.
마가복음 11:1-13:2의 단락은 예수가 성전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해(11.11) 성전을 나오면서 하신 성전 파괴 예언(13.1-2)으로 끝난다. 이 단락에서 예수의 반복적인 성전 출입이 두드러지며 모든 행위와 논쟁과 가르침 또한 성전에서 그리고 성전에 대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단락의 소재는 ‘성전’이라 보아도 무방할 듯 하다. 마가복음 전체 서사에서 ‘성전’을 둘러싼 예수와 유대교의 지도자들의 날카로운 대립은 결국 예수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는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의 핵이 성전 체제였고, 이 비판이 유대교 지도자들의 급소를 저격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11.1-13.2의 구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1) 11.15-18의 성전시위는 마가가 즐겨쓰는 샌드위치 구조의 내용(속)에 해당한다. 성전 시위를 감싸안고 있는 저주받은 무화과 나무의 운명은 성전의 기능과 운명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성전은 국가의 부가 모이는 곳이었다. 성전은 모든 성인 유대인 남성을 대상으로 세금을 징수했고, 예배드리러 오는 모든 자들을 상대로 환전 사업을 벌였으며, 각종 제사 물품들의 판매로도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부유한 자들의 보물과 재산을 보관해주는 역할도 했다하니 거기서도 수익이 발생했으리라 예상된다. 13절의 잎이 무성하여 열매가 있음직해 보이는 무화과 나무는 이러한 성전의 금전적 풍요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성전의 금전적 풍요는 백성의 구제라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의 기능과 전혀 무관했다. 성전은 지배자들의 배만을 불리고 그들의 삶의 안락과 안정을 유지하고 제국을 만족시키는 역할로 전락해 있었다. 예수의 무화과 나무 저주(14절)와 20절의 성취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고혈을 짜내는 성전이 몰락하리라는 예고이다.
2) 무화과 나무에 대한 베드로의 보고는 기도와 용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기도와 용서는 성전의 주요 기능이다. 죄를 사하는 예수의 행위에 유대 지도자들이 강하게 반발했던 이유는 용서의 선포에 대한 권한이 성전과 각종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들에게 주어진 배타적 권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25절에서 서로 용서해 줄 것, 그럴 때 하늘의 아버지의 용서가 그들에게 주어진다고 말한다. 성전과 제사를 통하지 않는 용서가 제시되고 있다( 정결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성전의 기능에 대한 도전과 대안으로서의 ‘서로 용서하기’는 정혜진의 “마가복음 서사담론의 성전-이데올로기 비판, 죄사함 논쟁대화(막 2:1-12)의 문학사회학적 연구”를 참고하였다). 27-33절의 예수의 권한에 대한 질문은 성전 시위 뿐 아니라 죄의 용서까지 성전의 배타적 권한에 도전하고 있는 모든 행위에 대한 질문이며,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와 뒤이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세 개의 질문 그리고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인가는 모두 예수의 권한과 관련된다.
3) “기도”의 모티프는 성전 시위(17절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에서 무화과나무의 죽음(24절 너희가 기도하며…25절 너희가 기도할 때에…)으로 또 율법학자의 비판(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 한다)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도에 대한 가장 긴 구절은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24)”이다. 이것을 성전의 기능과 연결시켜 보면 가난한 자들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기도가 성전을 통해 또 교회를 통해 응답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백성들의 매개자로서 성전과 종교 지도자들이 해야 하는 역할인 것이다.
4) 40절,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는 말씀은 41-44절 과부의 두 렙돈으로 이어진다.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를 모두 바쳤다. 가진 것 모두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선한 것이라는 성전 이데올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한 자들과 배우지 못한 자들에게 가장 강력하게 작동해서 아마도 가난한 과부는 가진 것 모두를 바치면서도 두 렙돈밖에 바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을 것이다. 이렇게 가장 가난한 이의 피같은 두 렙돈까지 빨아 들이킨 성전은 수치를 모르고 오히려 도도하고 웅장하고 거룩한 외관으로 그들 위에 군림한다. 예수의 관점에서 볼 때, 이제 성전은 자신의 원래 기능을 상실한 것은 물론 완전히 뒤틀리고 타락해 차라리 없애버리는 것이 나은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성전 파괴 예고가 이어진다. 이 성전은 예수의 식탁, 예수의 따르미들의 공동체, 하나님의 나라로 대체된다. 성전 체제가 경멸하고 배제한 이들이 그곳을 채운다. 자원은 늘 부족하지만(막 6.38) 하나님의 통치 원리가 실현되는 그곳은 신비로운 사랑의 방식으로 οἱ πτωχοί(가난한 자들)의 필요가 채워지는 곳이다.
이민규의 ‘마가복음 12:41-44에 나타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연구’는 과부의 두 렙돈의 본문을 서사비평적 관점에서 보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마가의 관심이 성전을 교회로 대체하는 것이었고, 만약 두 렙돈의 헌금이 기독교 교회에 봉헌되었다면 칭찬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려웠다. 예루살렘 성전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회가 그 본연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예수는 똑같은 방식으로 교회를 비판하셨을 것이다. 마커스 보그의 말을 빌자면 “예수와 그 시대의 지혜 사이의 투쟁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두루 관통하고 있는 종교적 실존 방식으로서의 두 유형 사이의 갈등”이지 기독교로 대체되는 유대교 간의 투쟁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본문은 교회 본연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숙고하고 교회가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가 아니라 배고픈 자에게 그 열매를 내어주는 무화과나무로서 존재하고 행동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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