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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적 성경읽기」를 읽다 본문
전성민 교수의 『세계관적 성경읽기: 콘텍스트를 품고 다시 텍스트로』를 읽었다.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는 이 책이 최종원 교수의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비아토르)맥을 같이한다고 말한다. 나는 최종원 교수의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가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많이 받았던 질문이 “콘텍스트로 나아간 다음 텍스트는 어떻게 되나요?” 였고, 저자는 그 질문에 답이 될 만한 책을 쓰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제1부 세계관적 성경읽기와 제2부 한국 기독교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세계관적 성경읽기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데 저자는 그것을 (1)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을 찾아가는 성경읽기, (2) 하나님의 창조를 긍정하며 대화하는 성경읽기로 제시한다.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을 찾아가는 성경읽기에서는 성경 해석의 상대성에 대해 공들여 설명하고 있다. 내가 특정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특정한 자리를 넘어 어떤 자리가 지금 이 시대에 성경을 좀 더 적절히 읽을 수 있는 자리인지 성찰하고 그 자리로 나가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말에 크게 동의가 되었다(24). 사실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지적 체계를 통해 객관적 진리에 도달하리라는 믿음의 한계와 오류는 이미 20세기 초반 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20세기가 무르익으면서는 순수과학의 영역에서도 학자들은 완전한 지식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과학적 진리를 ‘전문가들에 의해서 널리 인정되어온 견해’라고 정의하는 식으로 말이다(『역사란 무엇인가』, E.H.카, 김택현 옮김, 까치, 2015:88). 따라서 저자가 성경을 읽을 때 기억할 것을 당부하는 일련의 목록들은 새로운 것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상식에 가깝다. 그러나 유독 교회 안에서의 성경읽기과 해석이 이루어 질 때면 “권위”를 위임받았다고 자임하는 자들이 자신의 해석만이 객관적이고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황당한 일이 종종 벌어지기에 저자의 간곡한 당부는 의미있는 일이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유명한 <송곳>의 대사처럼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기 때문에 성경읽기와 해석에 나서는 사람들은 자신이 선 자리를 밝혀야 한다. 그래야 독자/청자가 저자/화자의 선 자리를 감안해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저자인 전성민 교수가 자신이 선 자리가 어디인지 밝히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분명 본문에서는 이점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는데, 혹시 지은이 소개가 이걸 대신하고 있는 것일까? 저자가 자신이 중요하다고 공들여 말한 것을 자신의 성경읽기에 앞서 구체적으로 실천해주었다면, 독자로서는 실제의 예를 볼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 하나님의 창조를 긍정하며 대화하는 성경읽기는 (1)에 비해 자꾸 멈춰서서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골똘히 생각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다 품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세계관적 성경읽기’라는 말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성경읽기가 세계의 모든 것을 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라는 문장에서 나는 ‘세계’와 ‘품어야 한다’는 말에 물음표를 적어넣었다. ‘세계가 뭐지?’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곧 이어 ‘거룩해 보이는 것, 세속적으로 보이는 것, 몸과 영혼, 육체와 정신, 주일과 평일, 예배당과 일상의 공간,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즉 세계의 모든 것과 관련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혼란은 가중되었다. 그가 정의하는 ‘세계’와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세계’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내가 세계를 생각했을 때, 나는 구체적인 국가들을 생각했던 것 같고 그 안에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다양한 사회와 계층과 집단과 개인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들 모두를 품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이어서 떠올랐던 것이다. 어느 누구도 세상의 모두를 품을 수는 없다. 모두를 품는다는 말은 지배, 주류 집단을 옹호하는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고 만다. 아마도 저자의 세계는 기독교인이 이해하는 세계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가 기독교인이 이해하는 세계라고 말해주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한다. 기독교가 이해하는 세계가 세상 사람 모두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세계에 대한 이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나를 혼란스럽게 한 다른 하나는 저자가 교리에서 벗어난 성서읽기의 미덕을 강조하면서도 교리에 근거한 성서읽기(타락이 성서읽기에 미치는 영향, 십자가 구속과 성서 읽기)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각각 교리에 비추어 해석한 성서읽기도 무엇을 주장하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꽤나 추상적이어서 (“십자가 구속은 권력지향적, 승리주의적 성서읽기를 거부한다. 성경을 읽을수록 삶이 낮아진다”와 같이) 아쉬웠다. 저자는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하는 성서읽기를 말하면서 “사회계층화, 성과 인종의 장애물, 길들이기, 격리, 성차별, 민족중심주의, 국수주의등의 문화적 장애물, 문자주의, 도덕주의 , 영웅주의...로 이어지는 신학과 싸워야 한다”고 옳게 말하고 있다. 나 역시 성서읽기는 아주 분명한 방식으로 편드는 읽기라고 믿고 있다.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이 어느 자리에든 서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의 편을 들고 있는지 밝히는 것은 성서해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심지어 윤리적인 문제라고 믿는다.
2부 한국 기독교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에서 저자는 자신이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다섯 가지 방향’으로 들어가는 말에서 언급했던 것을 성서 본문과 함께 풀어간다. 나는 2부에서 성서 해석을 기반으로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문제를 진단하고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는 저자의 말에 큰 기대를 품었다. 최근 회자되었던 ‘진보적 복음주의’에 대한 문제를 다루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다 보니 저자가 ‘복음주의’라고 말한 ‘복음주의’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름을 깨달았다. 저자가 대화의 상대로 설정한 것은 ‘진보적 복음주의’가 아니라 소위 비상식적인 교회들 또는 근본주의 진영이었던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에 나는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백번 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미 언론에서 밀도있게 다루었고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조차 ‘그건 아니지’라고 평가할 정도로 신뢰와 세력을 잃은 집단을 굳이 단행본을 내면서까지 다루어야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배 중독자 사울, 경계를 넘는 에스더, 아담인 하와, 광장에 선 바울…이 모든 성서의 해석이 근본주의 비판을 향하고 있는데, 근본주의 비판이 더이상 그렇게 어렵거나 비장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작은 자를 통해서 이어지는 은혜’(87)에서 저자는 인싸들은 은혜의 통로는 커녕 은혜의 걸림돌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는 변두리의 작은 아싸들을 통해 시작되고 흘러간다고 말한다. ‘은혜’로운 말씀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누가 그 변두리의 작은 아싸들인지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자신의 경험이라는 한계에 묶여 매몰되지 않기 위해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과 끊임없는 교류가 필요하다’(101)고 말하지만 그 경계가 무엇인지, 경계 밖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경계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주목하지 않는다. 저자가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차별받는 존재는 ‘여성’이 유일하다. 그런데 이 문장은 좀 이상하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민족 차별과 계급 차별이 해결된 것처럼, 결국 성차별 문제도 해결되어야 한다’. 민족 차별과 계급 차별이 해결된 것처럼? 나는 이 문장의 옆에 “언제?”라고 써 넣었다. 세계 역사와 기독교 역사가 분리되어 기독교 역사만 따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내가 아는 한 세계 역사에서 민족 차별과 계급 차별 역시 해결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반진화, 반이슬람, 반공주의, 반동성애로 규정되는 한국 복음주의의 현실을 해결할 ‘기독교 세계관은 평화의 세계관’이라고 결론내린다.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우선 한국 복음주의가 정말 ‘네 가지 안티’로 정의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근본주의 세력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몇몇 대형교회와 교단들이 그런 지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 그들만이 한국 복음주의인 것일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둘째, ‘평화’의 의미가 무엇인가이다. 저자가 이 장에서 한국 전쟁, 분단 트라우마를 다루고 있으니 혹시 전쟁에 반대되는 ‘평화’, ‘안정’, ‘질서’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유진 피터슨의 샬롬(온전함, 곧 한 사회의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건강을 뜻하는 것으로, 그런 사회는 신의 목적에 합당한 방향으로 고동치고 삶을 변혁시키는 사랑으로 물결치는 사회)인가? 나는 ‘평화’라는 말이 의심쩍다. 인싸들의 평화를 위해 저자가 말하는 작은 아싸들이 인류 역사 내내 침묵 당해왔다. 우리 사회가 온전하고 역동적이고 건강하다는 것을 전시하기 위해 불완전하고 힘없고 건강하지 않은 이들이 지워져 왔다. 신의 합당한 목적이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자신과 다른 이들을 신의 이름으로 교회와 사회에 합당하지 않은 존재들이라고 규정해 왔다. 따라서 나는 "이웃을 사랑해라/한다"는 말이 아니라 누가 내 이웃인지가 핵심이라고 믿게되었다. 우리가 공개적으로 우리의 이웃을 밝힐 때 그제서야 우리는 이웃의 편에 서서 우리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기때문이다. 은혜를 흘려보내는 그 작은 아싸들이 우리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누구인가를 저자 역시 명시적으로 밝혀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랬을 때 그 작은 아싸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으로부터 자신을 긍정하고, 힘을 얻고,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모든 이들처럼 나도 평화, 안정, 질서, 충만함, 건강을 원하지만 아직은 여전히 평화를 이야기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누더기가 된 채 입법되었고, 그래서 여전히 막을 수 있는 노동자의 사망을 비용의 문제로 허용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사회적 약자/소수자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목숨걸고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는 한 어떻게 기독교인이 평화로울 수 있는가? 몰트만은 이렇게 말한다. “평화는 폭력의 없음이 아니라 정의의 있음이다. 평화는 어떤 주어진 상황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을 줄여가는 과정이며 인류의 사회적/지구적 관계에서 정의를 건설해가는 과정이다.(Jürgen Moltmann, “European Political Theology”, Christian Political Theology, edited by Craig Hovey and Elizabeth Philips,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 pp. 3~22:15) 몰트만이 말하는 정의의 건설이 약자들의 투쟁없이 평화적으로 쟁취된 역사의 사례는 없다. 아마도 저자 역시 이런 평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의 콘텍스트에서 성서의 텍스트로, 성서의 텍스트에서 현실의 프락시스로 나아가기를 촉구하는 저자의 언어가 종종 교리적인 개념들과 두리뭉술한 좋은 말들로 무뎌져서 실상 이 책에 관심을 갖고 읽을만한 독자들(근본주의자들은 아닐 것 같다)이 ‘그래서 지금 여기서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지 어리둥절해지는 것 같아 아쉽다. “콘텍스트로 나아간 다음 텍스트는 어떻게 되나요?” 질문은 여전히 머리 속을 맴돌고 있다.
『세계관적 성경읽기: 콘텍스트를 품고 다시 텍스트로』, 전성민, 서울, 성서유니온,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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