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우리들의 신학

인간다움을 잠식하는 어떤 것이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다 줄리 만무하다 본문

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인간다움을 잠식하는 어떤 것이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다 줄리 만무하다

BundleE 2021. 6. 10. 11:23

“기성세대는 자신들이 행했던 가부장적 질서로 여성에게 안겼던 불평등에 대한 보상 청구서를 뒤늦게 2030세대 남성에게 들이밀며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이준석)

 

어느 독일인의 말. "나는 1945년 이후에 태어났으니 나치가 유대인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든 현재 나와는 도적적으로 어떤 연관성도 없다."(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312) 일본인들도 아주 쉽게 같은 논리를 들이댈 수 있다. 전후에 태어난 세대들이 어째서 자신들이 하지 않은 행위에 대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에게 사과하고 배상해야 하는가? 제국주의가 짓밟은 토착 원주민에 대한 사과와 배상은? 미국 백인들의 흑인 노예 착취와 그에 대한 사과와 배상은?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우리가 이야기 하는 존재이며 서사적 탐색으로서 삶을 살아간다고 말한다. 나에 대한 질문은 내가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도덕적 고민은 내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 보다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에 가깝고,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부족, 내 나라의 과거에서 다양한 빚,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내 삶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연관된다는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도덕적 책임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310, 321)

 

2030 남성들의 실체가 모호하고, 자신들이 페미니즘에 의해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이대남들은 필시 정치적 편의를 위해 주조된 일종의 가설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준석씨의 논리는 꽤나 그럴 듯 해서 많은 이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을 것 같다는 안 좋은 느낌이 든다. 이준석씨의 논리가 어떤 사고에 기반하고 있는지는 『정의란 무엇인가』의 9장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를 읽어보면 좋겠다.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2030 남성들도 이준석씨도 진공 속에서 태어나 자라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탄생과 함께 어떤 이야기 안으로 들어왔다. 그 이야기 중에 우리는 가부장적, 남성중심적 이야기 가닥이 있다는 것을 안다. 페미니즘은 그 이야기 속에서 살아간 여성들의 삶을 발굴했고 비판적으로 연구했고 그 이야기 속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부속물로 살아왔음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오늘에도 여전히 남성들은 남성중심적 신화의 틀 안에서 여성을 부속물로 혹은 욕망의 대상으로 자신 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폭로했다. 페미니즘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남성중심적 이야기 전통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과 범죄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밝혀냈고, 남자 아이든 여자 아이든 안전하고 건강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이 이야기를 반성하고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내 삶의 이야기가 우리 엄마, 우리 누나, 내 여동생, 우리 반 여자 친구의 이야기와 연관된다는 의식을 남자 아이들이 의식하고 클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내가 선택한 것만 인정하고 책임진다는 유아적인 발상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공동체의 통시적 역사 안에서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그에 기반해 삶의 가치를 고민하는 것이 개인과 사회의 '진보'가 아니겠는가.

 

시험을 통한 공정한 경쟁이 진정한 가치라고 부르짖는 이준석씨의 주장은 거짓이다. 그 가치는 인간다움과 경쟁하는 것이다. 인간다움을 잠식하는 어떤 것이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다 줄리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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