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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들의 신학
양혜원 박사의 ''제2의 성'으로 산다는 것 1'을 읽고 본문
양쌤의 이번 글을 읽은 첫인상:
1. 읽을만 하네(적어도 이해가 안되 짜증이 치미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음)
2. 시몬느 드 보봐르, 메를리 퐁티, 피터버거...거대한 이름으로 기선제압?
3. 보봐르와 피터버거, 위고 인용을 보며 - 창조적 전유인가 악의적 전유인가?
4. 서양 철학사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용감함, 모든 것이 양쌤에게는 이토록 단순명료하다니, 다시 봐도 놀라움.
이번 글의 제목이 '제2의 성'으로 산다는 것(1)인데 제목이 페미니즘의 냄새를 풍긴다는 점에서 <교회언니의 페미니즘 수업>이 떠오른다. 내용이 제목을 배반하는 것이 양쌤의 특징인가보다. 내용만 봐서는 '불러내기'로 시작해서 '불러내기'로 끝나니까 보통은 이럴 경우 무난하고 정직하게 '불러내기'라는 제목을 붙일만도 한데 말이다.
시몬느 드 보봐르가 '인간'이 아니라 여성을 불러낸 이유: 여성은 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될 수 없는 여성은 자기가 될 수도 없다. 남성을 norm으로 하는 세계에서 여성은 abnorm, subnorm에 불과한 Secondary Sex, 부차적인 성이다. 인간에게는 자신(self)이 있지만 여성을 부산물로 치부하는 남성중심적 세계에서 여성은 자신(self)이 없다는 것이 보봐르의 발견 아닌가?
양쌤은 여성에게 남성중심적 세계, 가부장적 세계를 '객관'으로 '방안의 책상'으로 받아들이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여성이 인간이고자 하는 것과 방 안의 책상이 공존 불가능한 것이라면? 가부장제, 남성중심적 세계관은 여성이 '인간'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보봐르가 말하는 것이 이것 같은데?)
방안의 책상 숭배와 굴욕적 복종을 거부한 많은 여성들이 자기 몸이 부서질 때까지 그 책상에 자신의 몸을 던졌던 역사는 왜 이 글에서 깨끗이 삭제되어 있는지? 위고가 "아무리 니들이 악쓰고 죽음을 불사해 봐라 세상 바뀌나. 현상 유지에 협조하고 순응하며 살아" 라는 메시지를 위해 레 미제라블이 인용되는 것을 보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지만, 세상은 안 바뀌지 않았다.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싸우는 사람들이 없다면. 세상이 바뀌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기존 질서에 문제제기 하는 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침묵시킬까를 진지하게 숙고하고 기발한 전략을 고안한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자본을 독점하며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집단이다. 그래서 싸움을 거는 사람들은 불리하다. 죽을 수도 있는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왜 싸움을 걸까? 살고 싶기 때문에. 살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인간'이 되기 위해 투쟁해온 이들의 역사가 세상을 바꿔왔다는 사실을 일축하는 것 역시 현상 유지에 골몰하는 이들의 전략이다. 세상은 바뀐다. 우리가 싸움을 멈추지 않는 한.
특정한 세계관 없이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피터 버거 뿐 아니라 뒤르켐 이후의 사회학은 이 세계관이 당연한 것(객관적 진리)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상의 내용을 폭로한다. 세계관은 그야말로 방안의 책상처럼 누군가 들여놓은 것으로 인간적 구성물이지 신적 질서나 창조 질서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판적으로 분석되고 평가되고 바뀌어야 할 대상이지 영구적으로 바뀌지 않는 혹은 비판받고 평가받을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원부터 존재한 객관적 진리라고 믿었던 방안의 책상의 역사성이 폭로되고(그건 어느 날 아빠가 우리와 아무 상의없이 은근슬쩍 들여놓은 것이다) 그것의 무용함과 해로움이 치열한 논쟁을 통해 입증되었다면 책상을 폐기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선한 선택일 것이다. 책상을 그리워하는 사람? 물론 있겠지. 그러나 책상에 걸려 매번 멍들고 피나고 깨지던 가족들은 책상으로부터의 해방을 반길 것이다. 책상이 없어져야 그 다음에 그 자리에 우리가 모두에게 유용한 어떤 가구를 들일 것인지, 아니면 아무 가구 없이 여유있는 공간을 누릴 것인지 논의할 수 있다.
인간 규범이 방 안의 책상이라면, 그것이 오른손잡이 남성만을 위해 고안되어 다른 이들에게는 여러모로 폐만 끼치는데도 그들이 그 책상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면, 인간이 되고자 하는 모든 다른 존재들은 글쎄...또 싸울 수 밖에.
‘제2의 성’으로 산다는 것 1(양혜원)
여자는 자신이 되기 이전에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여자로 길러진다. 여자가 태어났을 때 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현실이 그렇다. 혹,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라는 말을 들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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