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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들의 신학
성서의 역사비판적 학문을 잃은 것 본문
신학교 학자들의 대부분은 해석적 ,역사적 과업과 성직 봉사의 과제 사이에 놓여 있는 골을 메우는 작업을 성직자가 될 학생들의 손에 맡긴다. 성직자는 가치중립적, 역사적 해석과 거룩한 책으로서의 성서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 사이의 매개자가 될 것이 기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 미래의 봉사자는 성직 봉사의 과제와 해석학에서 습득하는 것 사이에 있는 이 불일치를 의식하고 있지만 문제의 요점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학에서의 역사적 비판의 모델을 목회적인 일에도 확대시키려고 하든가 아니면 세미나나 대학에서 배운 것은 잊어버리고 교리적 패러다임으로 다시금 회기해 버리든가 둘 중의 하나가 된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은 첫걸음으로 가치중립적, 역사적 해석의 방법을 배운다. 다음으로 신학적, 목회적 적용을 배우는데 그것은 처음의 것과 통합적 형태로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기성의 경건이나 교의학적 관심 때문에 힘든 역사적 연구를 포기해 버릴 유혹은 아주 크다. 이렇게 하여 성서학은 역사적 컨텍스트 안에서 텍스트의 의미를 연구하는 것도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는 텍스트의 의의를 연구하는 데도 실패하고 있다. 이러한 실패는 왜 성서의 역사비판적 학문이 오늘날의 교회공동체에 이렇게도 적은 영향력밖에 주지 못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한 큰 이유 중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 『돌이 아니라 빵을』, 김윤옥 옮김, 대한기독서회, 1994, 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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