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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의 여성 재현에 대한 정치신학적 고찰 본문

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누가의 여성 재현에 대한 정치신학적 고찰

BundleE 2023. 1. 5. 14:58

누가의 여성 재현에 대한 정치신학적 고찰

 

7:36-50 중심으로

이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썼다. 논문을 쓰기 시작하던 시점부터 몇개월은 소논문과 학위 논문의 차이를 배우면서 흘러갔고, 성서 본문과 참고 문헌의 범위가 점점 확장되면서는 이걸 내가 있을까 의심하면서 시간이 흘렀다. 시작할 머리 속의 논문의 구조를 글로 구현할 있을만큼 뚜렷하게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아주 순식간에 구축했다고 생각했던 구조가 붕괴되었고 내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없게 되어버렸다. 자료의 바다에서 목적지도 없이 표류하며 잡으려 하면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형태를 특정할 없는 미끄덩한 물체처럼 되어버린 '논문'이라 불리는 것을 마주할 때마다 끝낼 없는 것을 시작했다는 패배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완전히 다른 곳을 헤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종착지에 도달할 무렵에는 나의 처음 문제의식이 뼈대를 이룬 논문이 완성되었다. 지도교수님은 초반부엔 견고하다고 느꼈던 나의 생각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그래서 얼마나 쉽게 붕괴될 있는 지를 보여주셨다. 그러나 후반부 작업을 하면서는 내가 처음의 문제의식을 벼리지 못하고 있음을 일깨워 주시며 다시 자리로 돌아가 본문을 읽고 해석할 있게 도와주셨다. 멋진 경험이었다.

 

본문 주석을 하면서 애정을 느꼈던 단락이 있다.

7:36-50 기름 부은 여자를 누가는 '창녀' 읽히도록 의도했다. '창녀' 불리는 여자들은 예수 운동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요한 구성원들이었다. 이런 해석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창녀의 회개'라는 주제는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창녀의 회개가 창녀가 자신의 생계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역사적 예수는 창녀들에게 자신들의 생계를 포기하는 것만이 참된 '회개'라고 가르쳤을까?

 

"루이제 쇼트로프(Luise Schottroff) 창녀의 상황을 도덕적 관점이 아니라 사회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창녀인 여자의 회개가 매춘에서 돌아섬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쇼트로프는 예수 시대 많은 여자들이 성매매를 통해 생존을 유지했고, 그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예수가 창녀인 여자에게 당장 생계를 팽개쳐야 하는 회개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 본문의 창녀를 다루는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창녀에게 허용된 유일한 올바른 길은 성매매 행위에 대해 회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성매매를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문제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쇼트로프의 해석은 세리와 관련해서 때도 타당한 점이 있다. 만약 창녀에게 유일한 회개의 길이 생업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면, 직업 자체에 죄인이라는 혐의가 따라다녔던 세리들에게도 생업을 포기하는 회개가 요구되어야 한다. 그런데 3:12에서 세례 요한은 세리들에게너희에게 정해 것보다 받지 말아라라고만 한다. 예수가 아니라 세례 요한의 말이기는 하지만 구절은 세리의 직업적 행위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논문에서 확장시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모든 이가 존재 자체로 수용됨을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이다. 타자화된 비주류의 존재들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 존재 그대로 합류하는 것만이 진정한 그리스도 공동체다. 이방인의 할례가 하나님 백성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이방인의 육체 그대로 그리스도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는 바울의 주장도 이러한 맥락이 아니었을까.

 

살면서 존재 그대로 수용받는 경험을 우리 몇이나 할까. 그런 경험이 삶의 상처와 고통과 외로움과 결핍에 얼마나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될까. 1세기 지중해 세계, 철저한 젠더 이분법적인 계급사회에서 존재 자체가 인간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았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어떤 회복과 사는 맛을 제공했을까. 오늘의 우리는 그리스도 공동체에서 어떤 회복과 사는 맛을 경험하고 제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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