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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김현 일기 1986-1989 본문

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행복한 책읽기, 김현 일기 1986-1989

BundleE 2020. 1. 6. 11:03

얼마 전, 동네 도서관에서 “Littor”라는 잡지를 들척이다가 광고에서 발견하고는 대출해 온 책: ⟪행복한 책읽기, 김현 일기 1986-1989⟫, 문학과지성사.

 

이틀 정도를 읽고는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해 하루에 몇 장씩...아껴가며 읽었다. 일기 형식을 갖춘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저자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을까? (독자인 내가 그의 죽음을 지연시키고 있다.)

 

<1986.5.27 현영학이 번역한 제임스 콘의 ⟪눌린 자의 하느님⟫(이대출판부, 1980)을 구해 읽다. 현영학에 대한 관심 때문에 구해 읽은 것인데, 감동했다. 나는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에 대해 숙고했다. 때로는 혐오하면서, 때로는 연민을 갖고서,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도피의 마음으로,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하숙을 거절당한 것, 사투리 때문에 놀림받은 것, 전라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80년 이후에도 조용하다는 것......등의 것들이 뭉쳐져 내 가슴에 밀려들어왔다. 콘의 책은 내 경험 세계의 신학적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나는 억눌린 자인가? 아니다. 억눌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완전히 지배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콘의 언명 중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나의 신학적 한계와 내가 흑인들의 사회적 조건들과 밀착돼 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185)라는 선언이다. (40)>

 

현대신학 수업시간에 ‘흑인신학’의 거두로 배웠던 제임스 콘의 ⟪눌린 자의 하느님⟫을 나는 아직 읽지 않았다. 그런데 이 비평가 선생님은 번역자인 현영학 선생님에 대한 관심으로 이 책을 구해서 읽었다니!! (신학생 주제에 나는 현영학 선생도 모른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인문학자에게도 신학적 의미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존재함을 엿보게 된다.

 

그는 1989. 9.1 일기에서 “...자신들은 진리를 쥐고 있다는 사제적 권력의 한 전형적 모습...그것은 토론이 필요 없는 믿음의 세계에 속하는 것을 강요하는 사람의 당당함이다.(나는 그런 목사들이 싫어서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는데 요즈음은 그래도 목사들이 조금은 더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340)”라고 말한다.

 

교회의 어떤 특성이 어떤 사람들을 교회에서 뛰쳐 나가게 한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들이 신과 자신, 신앙과 삶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회의 위기가 어디에서 도래하고 있는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김현을 감동시켰다는 콘의 진술...해방신학에 퍼부어졌던 비난의 화살...그러나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있는가 말이다. 본 회퍼가 그랬다던가...우리는 매 순간 틀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지금 알고 믿는 대로 행할 수 밖에 없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알 수도 없는 영원한 진리에 대한 권위를 주장하기 보다 내가 그것을 제대로 못 볼 수 있다는 인정이 콘을 더 신뢰하게 한다. ⟪눌린 자의 하느님⟫도 읽어볼 것.

 

의문점: 현영학 선생이 유니온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제임스 콘, 폴 틸리히, 존 로빈슨의 책을 번역해 한국에 소개한 것이 80년대인데 왜 2019년에도 이런 이름들과 그들의 신학은 한국 교회에 이렇게 생소한 것인지?

 

<1988.10.12 파시즘이란 가만있게 내버려두지 않는 강요이다. 무엇을 말해야 한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무엇에 대해 가만히 있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 파시즘의 본질이다.

권위주의의 특성은,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라는 ‘믿음’에서 연유하는 오만과 뻔뻔함에 있다. 나는 옳으니까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뻔뻔함과 나는 옳으니까 내가 틀릴 리가 없다는 오만함은 동어반복에 기초하고 있다. 권위주의는 동어반복이다. 나는 권위있으니까 권위 있다!>

 

이렇게 말하는 내가 떠오르고, 연이어 이렇게 말하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파시즘, 권위주의의 verbal, nonverbal 언어는 지나치게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서 내가 그러고 있는지 알아차리기 쉽지 않고, 상대방이 그런 언어를 행사할 때도 내가 왜 불쾌한지 모른 채 불쾌하기 쉽다. 이런 언어는 교회안에 만연한다. “진리”의 담지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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