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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은유 본문
⟪여성, 타자의 은유⟫, 김애령, 그린비, 2012
니체, 레비나스, 데리다가 “타자”의 의미를 구성하고 전달하고기 위해 사용하는 “여성”이라는 은유에 대한 비판적 논의.
이 세 명의 철학자들은 주체의 입장에서 타자를 전유하지 않고 그 차이(혹은 차이내기)를 포착하려 한다. 이 때 발생하는 가장 당혹스러운 문제는 “어떤 언어로 타자를 말할 수 있는가”이다(72). 니체가 지적했던 바와 같이 모든 철학적 개념화는 주체를 중심으로 *동일화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72).레비나스, 니체, 데리다는 타자의 언어화 불가능성을 수사적 표현과 장치로 풀어내기를 시도하고, “타자”에 대한 개념화를 피하기 위해 다른 몇 개의 은유와 함께 여성 은유를 사용한다(73).
저자 김애령은 각 철학자의 사유에 대한 독자의 충실한 이해를 도우면서도, 페미니즘적 연구에서도 중요한 사상적 영감을 주는 이 세 남성 철학자의 여성 은유가,
-남성적 편견과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타자의 철학을 전개하는 이들의 철학에서 그들(주체로서)은 여성을 타자화시키고 있다
-결국, 그들의 사유에서 여성은 다시 (남성) 저자의 목적어/대상으로 돌아가고 있다(이중 박탈 - 스피박)
고 비판한다.
지난 학기 읽었던 ⟪교회를 위한 해석학⟫에서 저자가 해석학의 윤리적 대안으로 내세웠던 철학자가 바로 에마뉘엘 레비나스였다. 그는 “타자의 얼굴”이 발생시키는 윤리적 요구를 철학의 제1원리라고 말한바 있다.(레비나스의 타자는 고아, 과부, 가난한 자, 난민, 소수자이다.) 그런 철학자임에도 여성을 사유 주체(남성)에게 안정감과 친밀감을 제공함으로써 자기 세계 밖으로 모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존재로 이해한다는 것은 (헌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비슷하게 들린다: 남성은 에클레시아(민회)에 여성은 오이코스(가정- 경제economy가 오이코스에서 유래한다)에 적합하다 믿었으니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경험적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말해준다. 동시에 남성철학자들의 이런 한계는 여성 존재와 경험과 사유를 여성의 목소리로 언어화해야 하는 필요성을 역설한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끔 부닥치는 불편한(혹은 짜증나는) 상황들이 떠올랐는데...설명할 수 없었던 그 감정이 저자의 단어와 문장들을 통해 구체화되곤 해서 후련했다. 예를 들자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이나 어린 남성이 나를 어떤 단어(일반적 호칭이 아닌)로 호명하거나 형용사를 사용해서 나를 서술할 때가 있다. 물론 그런 모든 경우가 불편한 것은 아닌데, 어떤 경우는 뭔가 불쾌하지만 꼭 집어 말할 수 없어 그냥 “어 그래요?..그렇구나..”하는 정도로 넘어간다. 아마도 나는 이런 시도에서 나라는 존재를 자신의 이해 혹은 지배영역으로 포섭하려는 주체 동일화의 기미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남성들은(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유난히 자기 확신이 강하고(어떻게 모든 일이 그렇게 확실할 수가 있을까?) 다른 사람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관계를 주도적으로 관리하면서 타인에 대한 자신의 파악과 장악(유능함)을 과시한다. 나는 그것을 모호하게 “남성성”이라고 밖에는 정의하지 못했는데, 이 책 덕분에 좀더 구체적으로 이 사태를 언어화할 수 있게 된 셈이다(주체의 동일화과정, 일종의 comfort zone 넓히기). 사태가 언어화되면 저항과 비판은 한결 수월해진다.
코로나 사태는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주일 예배를 위해 모이는 것도 불안과 염려 가운데 취소되었다. 주일 예배는 취소될 소도 있지만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는 일에 관련된 모든 공동체적 사건들은 지속되고, 지속되어야만 하는데, 감염될까하는 두려움보다 감염시킬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삶의 반경을 최소화하다보니 단 며칠만에 내가 아주 좁은 섬처럼 느껴진다. 이 두려움은 철학적으로 유의미한 것일까 아니면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음의 소치일까?
경험을 경신하는 또 하나의 초유의 전염병 사태는 많은 이들에게 “타자의 얼굴”과의 대면이 아닌 단절을 가져온다. 타자들은 우선순위가 밀리고 쉽게 잊히고 곧이어 아예 떠오르지 않는다. 그 사이 “타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누가 알고 있을까...
*동일화: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불완전한 본질,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안을 극복하고 보완하기 위해 권력을 가진 “주체”들은 타자를 개념화하고, 자신의 이해범주에 포섭하고, 익숙하게 만들어가면서 (동일화) 자신의 지배영역 혹은 안정성 영역의 확장을 꾀한다. 이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의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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