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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가장자리의 민낯

BundleE 2020. 4. 14. 13:48

자신보다 약한 자를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먹이를 포획하고 착취하는 법을 너무 일찍 배워버린 아이들과 뻔하게 들리는 미끼 언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절박한 아이들. n번방이라는 세상에서 한 편은 포식자, 다른 한편은 먹이지만 결국 삶이 파국으로 미끄러져 내린다는 면에서는 같아 보인다.

 

이 사건을 놓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n번방이라는 곳에 갇혀버린 피해자와 가해자 아이들의 존재를 내가 알고 있었지만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어떻게든 생존하려고 더 이상은 밀려나지 않으려고 자신이 아는 모든 생존의 방식을 동원하며 악을 쓰고 있는 아이들을 애써 외면하며 말걸지 않은 어른이라는 것이 부끄럽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물론 가해자들을 다 색출해 마땅한 벌을 주고, 이런 식의 범죄가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음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피해자들은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극복할 수 있도록 적극적 지원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이 사건을 잘 처리하면 이런 범죄의 재발을 막을 수 있는 것인가?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사케르처럼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있는 아이들이 계속 존재하는 한 어떤 모양으로건 폭력과 범죄는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아이들을 이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우리가 폭력과 범죄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선 자본주의 논리에서는 밑바닥에서 자신을 지지할 잉여의 존재로 이 아이들이 필요하고, 또 불행과 불안의 가능성을 치유하는 것보다 안고 가는 것이 비용상 이득이기 때문일 것이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보호받지 못한 채 결국 자본주의 사회의 밑바닥에서 가장 혹독한 착취의 대상이 될 운명을 가진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흉측한 민낯이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조주빈과 그 일당들의 체포와 처벌로 수렴되기 보다는 이런 범죄를 배태한 사회, 경제적 환경 특히 저소득층 가정의 아이들, 학교 밖 아이들의 현실로 확산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있으나 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있는 이들의 현실을 직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들이 보이고 들리게 될 때, 낯선 타자로서의 아이들의 얼굴이 우리에게 윤리적 요청을 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면 우리 중 누군가는 그런 윤리적 요구에 반응해서 현장에 뛰어들어 아이들을 만나고 그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며 그들이 삶에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도록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무어라도 하게 될 것이다.

 

레비나스는 합리성 너머에서 타자와 마주하는 이들에게 “자기 보호의 합리성”을 뒤흔들고 선입견을 방해하며 문제시 하는 힘이 바로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초월적 계시, 궁극적 계시를 열렬히 소망하는 대한민국의 기독교인이라면 어찌 이런 기회를 마다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 교회가 차가워지고 더 이상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경험하지도 기대하지도 않게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초월적 계시가 발생하는 그곳에서 너무 멀찍이 서서 먼 산만 바라보고 있기에 너무 당연한 결과인 것이었다! 뜨거워지기 위해 별 짓을 다 하는 교회들이 많던데, 레비나스식 계시 체험을 적극 도입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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