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우리들의 신학

양혜원 박사의 이상한 글 본문

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양혜원 박사의 이상한 글

BundleE 2021. 3. 10. 10:42

나의 바쁜 학기 일정에, 읽어야 할 주옥같은 전공 서적이 넘쳐나는 판에 나는 이 글을 왜 읽고 있나...자괴감이 들었다. 자괴감 뿐 아니라 사실 심한 짜증과 함께 위산도 솟구쳤다. 그러니 건강에도 꽤 해로운 글인 셈이다. 이 글을 내게 '제보'하신 분은 아마 나보다 먼저 이런 경험을 했고, 그 빡침을 공유하고 싶으셨던 듯 하다.

양혜원 박사의 이전 뉴조 기획 연재를 읽을 때(벌써 2년전인가?)와 비슷한 경험이었는데, 이 분의 의식의 흐름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 자체가 고문이다. 정말 형편없는 저자인지 아니면 독자를 속이려는 잔머리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이력을 고려하건대 전자에는 가능성이 후자에는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세계 여성의 날이고 성평등과 여성인권이라는 주제가 "대중화"되고 있으니 여성인권 논의의 방향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은 어떻게 정리되고 있는지 살펴보겠다고 했다. 어떤가? 

 

나는 첫 문장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성평등과 여성인권이라는 주제가 대중화된다고? 팬데믹이 길어지면서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국가의 안정망 밖으로 내던져지고 그곳에서도 여성들과 아이들은 가장 취약한 상태에서 가난과 폭력과 죽음을 최전선에서 경험하고 있는데, 주제가 대중화된다고? 이것은 어떤 힙한 대중적 주제가 아니라 많은 우리들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다. 어째서 양혜원 박사에게는 이런 여성들의 절박함에 대한 한 방울의 공감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일까? 
기독교의 입장은 어떻게 정리되는지 보겠다고? 어떤 기독교? 왜 늘 양혜원 박사는 하나의 기독교, 자신이 발딛고 있는 보수적 복음주의적 기독교만이 기독교인 것처럼 대표성을 자진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오만함이 싫다. 

그는 이후 인권을 정리한다며 월터스토프를 끌어들여 중세 기독교에서 인권 개념이 발전했고 이것을 계몽주의가 받아들였다는 뜬금없는 원조 주장을 했다. 사실상 인권이라는 것이 어떤 개념인지 그것이 어디서 유래하는지를 따지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그가 말한 것처럼 인권이란 온갖 좋은 말들을 다 포함하고 있지만 "인권"이 수행한 역사적 기능을 살펴본다면(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박진우 옮김, 새물결: 249) 우리는 "인권"이라는 말이 얼마나 기만적으로 쓰였는지만을 확인할 뿐이다. 더구나 역사적 맥락을 따지자면 신민의 탄생이 아닌 시민의 탄생으로서의 "인권" 주창은 신학을 기반으로 한 왕정(왕권신수설)을 무너뜨리고 이성에 기반한 부르주아 정치(자유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주장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을 언급하더니 미국이 보수 기독교로 인해 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필리스 슐래플리 (Phyllis Schlafly, 1924-2016)라고 하는 반페미니스트 활동가를 소개한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여섯 자녀를 키우고 뒤늦게 법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이 문장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그래서 저자는 미국 사회에서 국제 수준의 여성 인권도 관철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는 술래플래인지 슐래플리인지하는 이 작자가 장하다는 것인가? 독자는 온갖 질문이 다 들지만 아마도 양혜원 박사는 자신의 의견은 없었다고 말하고 싶어하려나?

그 다음엔 미라슬라볼프가 등장하여 보수 종교인들의 정치 참여를 긍정한다. (출처를 찾아보고 싶은데, 알려주지 않는다.) 미로슬라볼프가 시장 논리가 독식하는 세계화의 흐름에 맞서,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믿는 종교가 중요하게 할 역할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란다. 뭐라고? 그러니까 시장 논리가 독식하는 세계화의 흐름에 맞서 보수 종교인 그러니까 술래풀래씨와 같은 자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우리가 아는 그 "미로슬라볼프"가 말했다고? 양혜원 박사는 심지어 미로슬라볼프가 "근본주의 성향의 종교인들"이 "종교적 배타주의를 정치적 배타주의와 결합시키지 않고, 이렇게 공적인 정치의 장에 나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사회의 다양한 일원들이 폭력이나 독재 없이 공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전광훈으로 대표되는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광화문 광장이라는 공적인 정치의 장에 나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고 이것이 우리 사회에 큰 유익을 주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는 것인가? 미.로.슬.라.볼.프.가. 

그 다음엔 자본의 세계화, 신자유주의라는 경제 원리에 잠식당하고 착취당하는 세계에서 그것에 맞설 세력으로 세계적 종교와 초국적 페미니즘을 말한다. 그런데 그 초국적 페미니즘은 갑자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된다. 초국적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는 로즈마리 퍼트넘, 롱, 티나 페르난디스 보츠의 『 페미니즘의 교차하는 관점들』 254-256에서 간략하게 배울 수 있다. 그것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탈식민지 페미니즘에 가깝다. 따라서 양혜원 박사가 이 둘을 이렇게 교묘하게 붙여놓고 비판하는 것은 일종의 사기다. 

다음의 문장이 초국적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도 문제다. 왜냐하면 
"비백인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 안에서 일어나는 인종 차별과 종교/문화 차별의 문제를 지적하며 제3세계 페미니즘, 탈식민 페미니즘 등을 주장하였는데, 최근에는 신자유주의 경제가 주도하는 세계화에 맞서 페미니즘 자체를 탈식민화하고, 불안한 조건에서 사는 99%의 여성들을 위한 페미니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 문장이 초국적 페미니즘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로즈마리 퍼트넘 롱에 따르면 '전 지구, 포스트식민주의, 초국가주의 페미니즘'은 전 세계의 유색인종 페미니즘(들)로 범주화된다. 
이어지는 문장: "이는 페이스북 COO 셰릴 샌드버그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부상과도 맞물려 있다." 

첫째,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이분은 정의되지 않은 용어를 너무 신기할 정도로 자유롭게 아무렇지도 않게 조어한다(정말 신자유주의적이다). 백인 중산층 여성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가리키는 말인 거 같은데...그냥 있는 말 쓰자. 희한한 뉘앙스 만들지 말고. 둘째, 그 이전 진술은 신자유주의 페미니즘과 동반자적 관계인가 아니면 대결적 관계인가? 아무리 봐도 두 문장은 전혀 다른 페미니즘을 가리키고 있는데, 저자는 마치 앞의 문장이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일종의 공모관계인 것처럼 말하면서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리고 나서 성평등이라는 용어보다 여성인권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주장한다. 그러니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분은 성평등이라는 말보다 여성인권이라는 말이 복음주의적으로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나보다. 

우리는 여성이 인간이 아닌 사회에서 살아간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남성이 인간으로 정체화하는 사회다. 남성은 인간으로서 인간 삶의 모든 것의 기준이 되고 여성은 그들에 의해 "정의"당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이런 사회이기 때문에 여성이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이런 사회이기 때문에 남성의 심기를 거스린 여성은 맞아도 싸고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이 어느 한 남성의 머리에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성평등이 옳다 여성인권이 옳다 싸울 생각은 없다. 그러나 여성이 인간이 아닌데 여성인권이고 나발이고 그런게 다 어디있단 말인가?!

자...이제 나도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배도 고프고 쓸수록 더 화도 난다. 저녁도 거르고 이 무슨 덧없는 분노질인가...자 마무리...

양박사는 기독교와 페미니즘이 손잡을 수 없는 이유는 "성적 자유"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런 저런 다른 이유들은 사실 다 설득력도 없고 변별력도 없고, 딱 하나 남은 페미니즘과 다른 기독교만의 "대의"라고는 앙상한 "순결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다음 두 문장은 정말 아무말 대잔치이니까 인용해본다. 

"성폭력은 기독교 입장에서도 여성인권의 심각한 침해라고 동의한다고 해도, 그 암묵적 전제가 성적 정절인 것은 변함이 없다...미국 페미니즘 진영 일부에서는 성폭력에 대한 고발과 규제의 확산이 자칫 청교도식 엄숙주의로 돌아갈 것을 우려하기도 하고, 또 일부는 결국 백인 복음주의 여성들이 이슬람 여성에 대해서 자신의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것에 불과하다 고 보기도 한다."

난 정말 귀를 아니 눈을 의심했다. 성폭력에 대한 암묵적 전제가 성적 정절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양박사와 나는 성적 정절을 강요하면서도 성폭력과 성매매와 온갖 포르노그라피를 허용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폭력의 피해자들이 숨죽이고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침묵속에서 절규하는 사회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 맞나? 성폭력이 여성인권의 침해라...성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가에게 "이건 인권침해에요!" 라고 말한다고 상상해보라. 그가 여성의 현실과 여성이 겪는 폭력을 얼마나 사소하게 만드려 애쓰는지 볼 수 있다. 인간일 수 없는 존재에게 인권침해가 가당합니까, 선생님...?

두 번째 문장은 더 웃긴데, 성폭력에 대한 고발과 규제의 확산이 청교도식 엄숙주의를 불러일으킬 것을 우려한단다. 그럼 청교도식 엄숙주의(그게 뭔지 몰라도), 뭐 그게 무서워서 성폭력 고발하고 규제하면 안된다는 것인가? 이런 우려의 당사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국 페미니즘 진영 일부인데 이 정신머리 없는 인간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저 양혜원의 뇌피셜일 뿐.   
   
글을 쓰면서 점점 허기도 지고 피로도 몰려와서 그래서 점점 더 화가났다. 이젠 등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다. 양혜원 박사의 글은 건강에 해롭다. 특히 그리스도교 여성들에게. 그러니 읽지 마세요. 제가 대신 읽고 제가 대신 아팠으니 당신은 절대 읽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런 글을 자꾸 실어주는 지면을 가지신 편집자님께 한 마디: 의견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일관성과 논리성이 현격히 떨어지는 글은 반려해서 독자에게 닥치는 읽기/해독하기라는 고통의 시간을 막아주십시오.  

 

 

cemk.org/20475/?fbclid=IwAR2Mb-AHsSUSEYUINzqSjkE2SzmRc6J6R-wlyp6ymXYNT9H4x3CuLns4myc

 

세계 여성의 날에 생각해 보는 기독교와 여성인권(양혜원)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이날은 각 나라마다 여성들이 지금까지 이룬 업적을 치하하고 성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앞으로 계속 이어갈 과제를 점검하며 독려하는 날로 기념되고 있다.

cemk.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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