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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들의 신학
의심과 의문으로 탐구하는 진리, 신앙, 신학 본문
지금 돌아보면 이전 내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은 다분히 근본주의적이었는데, 나는 성서와 목사의 해석을 의심하지 않도록 권고받았다. 질문은 허용되지 않았고, 의심은 저급한 수준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질문하지 않고 모든 것에 아멘하며 순종하는 이들은 순도높은 믿음을 가진 이들이었고 권위를 독점한 목사의 칭찬은 그들에게도 일정한 상징적 지위를 부여해 다른 이들이 그들을 지도자로 따르게 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진 이들은 높아지고, 의심 또는 의문을 가진 이들은 침묵하면서 목사의 모든 말이 관철되는 공동체가 되었다. 일단 인정된 종교적 권위는 무소불위의 힘이 되고 그 힘을 증폭시키기 위한 전략들도 갈수록 효과적으로 구사되며 신자들의 몸과 정신을 마비시킨다.
신학공부는 내가 경험한 공동체를 객관화시켜 볼 수 있게 해 주었고, 나는 곧바로 그것이 결코 건강한 교회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나의 마비되었던 과거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그런 교회가 그리고 그런 신앙이 가능했던 이유, 조건, 상황을 알고 싶고 설명해내고 싶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한다.
신학 공부를 시작하고 두 번째 학기. 성서의 권위에 대한 혼란이 찾아왔다. 성서 권위에 기반해 기독교의 절대성을 확신했던 나에게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수도 있다는 느낌은 공포에 가까운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끌어 주고 있는 교수님들이 있으니 안전하다고 느꼈고 이번엔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돌파해야 한다고 나 자신을 다독였다. 무엇이든 질문할 수 있다고 했던 신학교에서 '구약의 폭력성'에 대해 발제했을 때였다. 나도 모르게 보수적 복음주의 학자의 책(데이비드 램, 『내겐 여전히 불편한 하나님』(IVP))도 읽고, 진보적 학자(존 쉘비 스퐁, 『성경의 시대착오적인 폭력들』(한기연))도 읽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램의 논리는 하나님을 오히려 더 이상하고 불공정한 분으로 만들 뿐, 구약의 폭력적 본문을 이해하는 적절한 해석적 틀을 제공해 주지 않았다. 이미 스퐁의 접근이 훨씬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차마 성경의 '권위'(성경의 무오류성과 동의어)를 인정한다고 할 수도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어 나는 "복음주의" 진영 학자의 말을 빌어 성서의 권위에 대한 '정의'의 수정이 필요하다며 발제를 마쳤다. 그 때 교수님이 뚱한 표정으로 건낸 첫마디는 "그건(성경의 권위) 우리 안에 전제 되어 있는 거 아닌가?"였다. 같은 학기 요한복음 수업시간에는 질문(질문은 기억이 안남)을 했다가 "너의 믿음이 걱정된다"는 말을 들었다(나도 진지하게 내 믿음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신학교 수업 시간에 그런 코멘트를 학우들 앞에서 들으니 망연자실). 나를 해방된 신앙으로 이끌어주고 있다 믿었던 교수님들이 내 질문의 한계를 정하는 자들이 되어버리는데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탐구 중이고 배회하고 있다. 진리는 나에게 단 한번도 '현현'한 적이 없다. 나름 흔하다는 방언도 나는 경험하지 못했고, 환상같은 것도 본 적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 그래서 앞으로도 나는 한참을 더 배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지다 못해 그나마 남아 있는 신앙의 연약한 불씨마저 꺼져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던 2-3년 전과 달리 나는 꽤 태연해졌다. 헤매고 있지만 질문들을 돌파해 가며 점진적 확신에 이를 것이라는 기대도 하고 온갖 질문과 의심과 배회 역시 신앙의 일부분이라는 것에 천천히 익숙해져가는 중이다.
사실 한스 큉의 『그리스도교』의 본문만 게시하려 했는데, 내가 어째서 이 문장들에 이토록 꽂히는지 생각해 보다가 의도치 않게 내 역사를 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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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 그리스도교와 배타주의적 유다교, 이슬람 지상주의적 이슬람교의 목표는 결국 전통신앙을 위협하는 현대에 대한 반란인 바, 이것들은 예전의 종교, 정치, 경제적 상황을 복원하기 위해 기꺼이 현대를 정지시키고자, 아니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어떤 종교가 자기 성서의 낱말과 문장 하나하나를 축자적으로 신봉하는 것이 이른바 근본, 정체성, 진리에의 확실성을 보존하는 길일까? (792)
개신교의 위대한 힘의 본질은, 그리스도교의 원천적 소식인 복음과의 언제나 다시금 새로운 대결 안에 있다.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은폐, 희석, 왜곡 아니 심지어 폐기되는 곳은 어디든, 저항이 자리해야 할 장소다. (793)
방향감각을 상실한 시대, 사람들이 어떤 근본바탕을 애써 찾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종교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그리고 뚜렷한 바탕 없는 종교는 시대정신에 함몰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상실한다. 그러나 또한 이론의 여지 없는 것: 근본바탕을 고수하는 것이 곧장 근본주의와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온갖 종교의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들 성서를 축자적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바탕을 온전히 보전하거나 다시 찾아 얻었다. 결론: 근본주의 없이도 ,근본바탕을 지켜낼 수 있다.
종교적 진리의 확설성에 대한 열망은 정당하다. 그러나 또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종교적 진리의 확실성의 고수가 곧장 근본주의와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확신은 모험과 회의를 기피하는 보험 사고방식이나 보루 심성, 요새 전략 따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크나큰 태연함에 터한 삶을 뜻한다. 하느님의 진리는 인간의 우악스런 도움 없이도, 스스로를 관철하리라는 것을 굳게 신뢰하는 가운데. 의심과 모험 또한 신앙의 일부분이며 자신의 한계에 대한 통찰과 불가피한 관용 또한 신앙의 한 부분이다. (798)
더 많은 인용(사실 수십 페이지를 통째로 옮기고 싶다) 을 하고 싶지만...절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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