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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들의 신학
바울 선포의 구체적인 맥락 본문
Stanley K. Stowers, “Social Status, Public Speaking and Private Teaching: The Circumstances of Paul’s Preaching Activity”, Novum Testamentum XXV, 1 (1984):59-82
헬레니즘 도시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선포하고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며 지역에 기독교 공동체를 생성했던 바울 선포의 구체적인 맥락은 어떠했는가? 오늘날 우리가 '설교preaching'하면 떠올리는 커다란 청중을 대상으로 하는 주일 설교를 생각한다면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스타워스는 말한다. 이 논문은 흔히 바울이 개방된 공적 장소에서 무작위의 청중을 대상으로 말씀을 선포했을 것이라는 널리 퍼진 이미지에 도전한다.
김나지움이나 극장, 공공 건물에서의 연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연설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지위와 명성이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순회 교사였던 바울의 공적 지위는 그의 직업인 천막장이(a tent maker)이자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에 의해 규정되었을텐데, 이것은 공적 연사의 자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장에서 거리 모퉁이에서 좁은 골목에서 무작위 청중을 대상으로 하는 연설은 견유학파 교사들의 특징이었는데, 그들은 청중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특이한 행색이나 행동을 해야만 했다. 개인들에게 악행을 그만두기를 가르치는 견유학파 교사들에게 이런 방식은 효과가 있었을 지 모르지만 바울은 공동체를 형성하기를 원했고, 이런 방식의 연설은 그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학생-교사의 만남이 있어야 하고 따라서 안정적으로 만남을 이어갈 수 있는 컨텍스트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도시에 들어간 바울은 대체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고 어디서 그들을 가르치고 지속적 만남을 이어갔을까? 그는 새로운 도시에 들어가면 우선 회당을 찾고 거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방인들을 만났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에의 믿음을 가르쳤기 때문에 회당에서의 선포는 지속될 수 없었다. 회당에서 쫓겨난 다음 바울은 개인의 집에서 그 집 주인의 지위와 후원을 보증삼아 설교를 지속했던 것 같다.
스타워스에 의하면 개인 집이 이런 식으로 교육과 설교의 무대가 되는 것은 당시 철학 교사들, 소피스트들, 수사학 교사들에게 흔한 일이었다. 사실 고등교육은 개인의 집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따라서 바울이 개인의 집에서 교육하고 이방인들을 개종시키고 그들이 지역의 교회가 되는 패턴은 당시 다른 철학, 수사학 교사들의 패턴을 따른 것이다. 교회가 개인의 집에서 가르치는 관례는 2세기 넘어까지 지속되었다.
한 사람이 가르치고 설교할 지위를 얻는 것, 청자들이 그를 믿고 경청하게 만드는 권위를 확보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우리가 바울은 'divine man'이었기에 그를 모르는 도시에 들어가더라도 거리에 서서 말만 시작하면 군중들이 모여들어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으리라는 게으른 추정을 하지 않는다면, 바울이 청중을 확보하는 문제는 상당히 까다롭고 복잡한 문제였을 것이다. 스타워스는 바울이 개방된 장소에서 거기를 우연히 지나가던 군중들에게 설교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 바울은 김나지움, 극장, 시의회, 공공 건물에서의 연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지 않았기에 이런 공적 연설을 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바울이 헬레니즘 도시들에서 공동체를 일구는 데 중심이 되는 자리는 바로 개인의 집이었다. 바울에게 집을 제공한 호스트가 그 도시에서 확보한 사회적 자본(명예, 신뢰, 친구(혹은 피후원자))은 바울이 선교활동을 펼치는 기반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최초에는 바울이 아니라 집 주인을 믿고 바울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을 것.
그렇다면 개인 집을 바울에게 제공한 이들의 역할이 너무 과소평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 1세기 그리스-로마 사회의 가정, 집, 가족 관계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 가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논문이다.
질문해 보지 않았었지만 떠오르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고대 사회에서의 '전도'라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각 가정 교회는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는가(위계적으로 혹은 수평적으로?), 지역의 가정 교회들을 중심으로 성장, 확장했던 기독교 공동체에서 각 가정교회들은 서로 어떤 관계에 놓여 있었는가, 서로를 하나의 바디로 여기고 공동의 모임, 공동의 조직을 구성하려 시도했는가, 그 과정은 어떠했는가. 각 가정교회의 수장은 여자이기도 하고 남자이기도 했을텐데 이 작은 공동체들이 위계적으로 조직되면서 여성들이 배제되었다면 그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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